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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해하 전투

by 황금나무(Golden Tree)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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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오자, 항우가 말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하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이에 우희가 답하였다. “한군이 이미 천하를 다 빼앗으매,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1. 패왕 항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중국 전역을 가혹한 법으로 통치하였다.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익숙지 않았던 과거 육국의 백성들은 이에 큰 불만을 품었다. 그리하여 진시황제 사후, 중국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노력으로 진나라는 겨우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나라 땅에서 거병한 항우가 거록에서 진나라군을 대파하였고, 이로써 진나라의 멸망은 가속화되었다. 이후, 항우는 신안대학살을 일으키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하였다. 결국 진나라는 중국대륙을 통일한 지 15년 만에 멸망하였다. 비슷한 시기, 유방과 항우는 홍문연에서 만났는데, 항우의 모사 범증은 여기서 몇 번이고 유방을 죽이려 했다. 왜냐하면, 유방이 항우보다 먼저 함양에 입성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결국 유방은 항우와 범증의 견제로 파촉으로 쫓겨 가다시피 하였다. 그때 당시의 파촉은 거의 깡촌이나 다름없었다.

 

2. 유방의 반격

그러나 유방은 소하 등의 보필을 받아 관중을 장악하였고, 한신을 선두로 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그즈음 항우는 제나라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전영과 싸우고 있었다. 한창 싸우고 있던 항우는 유방에게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결국 유방을 중심으로 한 제후연합군은 초나라의 중심지인 팽성을 함락시켰다. 한편, 항우는 전영을 제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나라인들은 항우에게 사생결단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항우의 잔혹함에 제나라인들이 치를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나라 땅에서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항우는 나머지 군사들을 제나라에 놔둔 채 정예군 3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팽성을 기습공격하였다. 이 공격에 크게 당황한 56만의 유방군은 대패하였고, 유방은 도주 끝에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의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3. 포위되는 항우

유방의 상황은 위태로웠지만 관중에서 소하가 열심히 지원한 덕분에 가까스로 병력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형양에서 항우와 대치하였지만 그곳마저도 항우의 수중에 넘어갔다. 유방은 기신의 희생으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고, 전황은 항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팽월이 초나라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신이 하북을 평정해 가자, 전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이후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군과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군은 광무에서 긴 시간 대치했지만, 항우는 딱히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한편 팽월은 초나라군의 후방을 계속 교란하였고, 동시에 한신이 항우의 맹장 용저를 유수에서 대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포마저 유방 측에 합류함으로써 전황은 항우에게 불리해져 갔다. 형세는 유방, 한신, 팽월, 경포 등이 항우를 포위한 형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방은 오창의 곡식창고마저도 차지하였기에 보급에서도 항우보다 우위에 있었다. 항우는 초조했다. 이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항우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에 유방은 항우에게 중국천하를 양분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초조했던 항우는 이 제안을 승낙하였고,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과 유방의 아내 여후를 석방하였다. 협약 체결 후 항우는 그때까지 자신과 함께했던 제후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이후 팽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4. 유방의 배신

유방 또한 장안으로 복귀하려 하였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이 그런 유방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유방에게 항우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비록 협약을 깨는 비겁한 짓이지만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설득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인 유방은 본거지로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공격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그런 유방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미 팽성과 그 주변 일대가 함락되었기에, 항우는 퇴로가 차단된 상황이었다. 한편 유방은 장량의 간언을 받아들여 팽월과 한신에게 더 많은 땅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합류하지 않고 자신과 항우의 전쟁을 관망하는 팽월과 한신을 합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군대만 합류한다면 항우를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을 터였다. 결국 한신과 팽월은 유방군에 합류하였고 이로써 초한쟁패기의 영웅들이 해하에 모였다. 기원전 202년, 한나라의 기치아래 모인 군대가 항우와의 마지막 결전을 치르기 위해 진군하였다.

 

5. 전투 진행

한나라의 연합군에서는 한신이 선두에서 30만 병력을 지휘하였다. 반면 초나라군은 10만 명이었다. 그러나 병력이 적다고 하여서 초나라군이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나라군은 정예로써 이미 팽성 전투에서 3만 명의 병력으로 56만 명의 한나라군을 격파한 적이 있었다. 전투는 한신군과 항우군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한신의 선봉대가 항우군의 본대와 싸웠으나, 항우군은 한신군을 밀어붙였다. 이에 한신은 군대를 뒤로 후퇴시켰다. 한신의 선봉부대가 후퇴하자, 항우의 초나라군은 이들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초나라군은 너무 깊숙이 들어갔고, 이때를 노려 한나라군의 좌우익이 초나라군의 양측면을 강타하였다. 이에 초나라군은 당황하였고, 후퇴하던 한신의 선봉대마저 방향을 바꿔 초나라군을 공격하였다. 결국 초나라군은 세 방향에서 포위된 채, 일방적으로 공격당했고, 약 8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2만 명의 초나라군이 살아남았지만 이미 전세는 크게 기운 상태였다. 한나라군은 그들을 포위하였고,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불렀다. 이에 초나라군은 전의를 상실하였고, 많은 수의 초나라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했다.

 

6. 항우의 도주

그날 밤, 항우는 자신을 따르는 병사 800여 명과 함께 한나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이윽고 날이 밝자, 항우가 도주했다는 것을 안 한나라군은 추격대로 기병 5천여 명을 편성하여 항우를 뒤쫓았다.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 그의 곁에는 100명 정도만이 있을 뿐이었다. 도주하는 길에 항우는 어떤 노인을 만났고, 그에게 길을 물었다. 그 노인은 항우에게 원한이 있었는지 늪지대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고, 항우는 이 말에 속아 늪지대로 가게 되었다. 항우는 늪지대에서 막혔고, 추격대마저 그를 따라잡았다. 그러나 항우와 100명의 전사들은 5천 기병을 돌파하였고, 동성이란 곳에 도착하였다. 그때 항우 곁에는 28명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곧 그곳에 한나라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항우는 용맹하게 싸웠고, 한나라군 수백 명을 죽여 버렸다. 반면, 항우군의 전사자는 2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항우는 계속 도주했고, 결국 오강에 이르렀다. 그는 이제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휘하의 전사들과 함께 한나라군에게 돌격하였다. 그는 용맹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싸웠고, 결국 자결하였다. 이로서 초한전쟁이 끝났다.

 

 

7. 황제 유방

항우를 무찌른 유방은 이후, 한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춘추전국시대와 초한쟁패기의 긴 전란 끝에 마침내 중국에 평화가 찾아왔다. 진나라는 15년 만에 단명하였지만, 한나라는 무려 400여 년간 존속하였다. 따라서 통일왕조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진나라는 실패한 왕조였고, 한나라는 성공한 왕조였다. 또한 이 한나라로 인해 중국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한자, 한족이라는 말은 바로 이 한나라로부터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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