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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비수 전투

by 황금나무(Golden Tree)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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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으로 돌아가는 전진의 황제 부견은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가 않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자신은 백만 대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백만 대군으로 동진까지 정벌한다면 중국전역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터였다. 그러나 고작 8만 명에게 자신의 백만 대군이 패배하였다. 왕맹이 동진을 정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 몹시도 통탄스러웠다.

 

1. 북중국 통일

기원후 383년경, 전진의 황제 부견은 한나라 이후 분열되어 있었던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한족이 아닌 저족 출신이었지만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명재상 왕맹을 얻었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으며, 장강 이북과 서역을 모두 차지하였다. 더군다나 사천지방도 이미 부견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다. 이제 통일대업의 마지막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강남에 자리 잡고 있는 동진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2. 불안한 통일

동진은 서진 멸망 후 서진의 황족인 사마예가 장강 이남의 건강에서 세운 나라였다. 그때 당시 동진의 내부사정은 상당히 안 좋았는데, 문벌귀족들의 권력투쟁으로 국력이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진은 한족 정통 왕조였다. 이러한 사실은 전진이 차지하고 있던 북중국의 한족들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한편으로 전진의 내부사정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통일이 너무 급격하게 이루어진 탓에 전진내부에서는 한족과 이민족들 간의 갈등이 상당히 심하였다. 특히 한족들은 이민족 왕조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전진의 지방통제력이 약해진다면, 전진은 언제든지 공중분해될 수 있었다.

 

3. 부견의 야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중국을 통일한 전진의 황제 부견은 ‘통일된 중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에 몹시도 욕심을 냈다. 그렇기에 그는 민족을 구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저족이 아닌 한족식 중국왕조의 통치체제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견이 동진 정벌의 뜻을 밝히자, 전진 조정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그의 신하들은 물론 황실도 반대하였으며, 그 왕맹조차도 반대하였다. 왕맹은 임종 시에도 동진을 정벌하지 말라는 유언을 부견에게 남겼을 정도였다. 왕맹의 말까지 무시할 수 없었던 부견은 왕맹 사후, 한동안은 동진 정벌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맹 사후 7년이 지나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진정벌을 강행하였다. 아직 내부 단결이라는 우선과제가 있었지만 부견은 이미 중국통일이라는 대업에 눈이 멀어있었다.

 

4. 백만 대군

전진의 황제 부견은 동진정벌군으로 무려 백만여 명을 동원하였다. 전진의 백만 대군은 동진을 향해 세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동진 입장에서 세 갈래로 진격하는 전진의 군대들 중 하나라도 막지 못한다면, 나라가 멸망할 것이 뻔했다. 그야말로 국가존망의 위기였다. 전진의 대규모 출병소식을 들은 동진은 8만 명의 병력을 모았다. 언뜻 병력면에서 열세로 보였지만 이들은 비교적 정예였다. 반면, 전진군은 비록 백만이기는 하였지만 거의 대부분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동진군은 선제적인 공격을 가했고, 이 공격은 약간의 성과가 있었지만 전황을 뒤집지는 못하였다.

 

5. 스파이

그러던 중 전진 측에서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이 왔다. 그러나 그는 사신이 아니라 거의 스파이였다. 그것도 동진을 적극적으로 돕는 스파이였다. 그 사신의 이름은 주서였는데, 그는 한족 출신으로서 양양태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전진에 항복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동진 조정에 항복을 권유하기는커녕 전진군의 전략을 모조리 알려주었고, 전진군이 모두 도착하기 전에 전진군의 선봉을 치면 전진군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6. 100만 vs 8만

동진은 전진에게 항복할 것처럼 행동하며, 한 가지를 요구하였다. 그것은 전진군이 뒤로 조금만 물러나준다면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전투 당일, 양군은 비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전진은 동진의 요구를 수락하고, 군대를 뒤로 조금씩 물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진군은 전진군이 뒤로 물러나는 틈을 노려 전진군의 후방을 강타할 생각이었다. 전진의 황제 부견 또한 이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만약 동진의 항복이 기만이고, 후퇴하는 전진군을 공격한다면, 부견은 군대의 방향을 돌려 역으로 동진군에게 반격을 가하려 하였다. 전진군의 병력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생각대로만 된다면 그는 자신의 야심을 이룰 수 있을 터였다. 허나 변수가 있었다. 부견의 이러한 계획이 휘하 장병들에게 모두 전파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전투 당일, 전진군이 뒤로 약간 후퇴하자, 동진군이 비수를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진군은 곧 혼란에 빠졌다. 전진군의 병사들이 전략적 후퇴를 패배로 인한 후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주서가 진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전진군이 패배했다고 외치니, 그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이어서 도하를 완료한 동진군이 전진군을 공격하자, 전진군은 순식간에 붕괴하였고 곧 궤멸되었다. 전진의 황제 부견은 혼란 중에 겨우 살아남아 장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어서 동진군은 그 기세를 몰아 진격하였고, 황하 이남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7. 재분열, 허망한 승리

부견이 장안으로 귀환하였지만 전진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전진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지방들은 동요하였다. 이어서 각지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고, 제각기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미 전진에게는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없었다. 부견이 있는 장안 또한 반란이 일어났고, 전진의 황제 부견은 살해당하였으며, 황족들은 거의 몰살당하였다. 이 전투 이전만 하더라도 전진의 황제 부견은 중국통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탐욕에 눈이 멀어 집안단속을 먼저 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출병하였다가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여러모로 고구려 침공으로 망한 수나라 양제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 동진은 전투의 승리로 흥성할 법도 했지만, 오히려 승리의 주역이었던 북부군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멸망하였고, 대신 신왕조가 들어섰다. 결과적으로 비수전투는 승자가 없는 허망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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