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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20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음으로서 임진왜란이 끝났다.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곧 일본 내부는 갈등과 대립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장파와 문치파가 대립하였고,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대립하였다. 끝내 일본 전역은 서군과 동군으로 갈리었고,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일본의 지배자가 될 터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년 10개월 만이었다. 1. 도요토미 가문의 비극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53세에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츠루마츠였다. 그러나 츠루마츠는 선천적으로 병약하여 생후 2년 만에 사망하고 만다. 히데요시는 매우 슬퍼하였으나, 그로서는 더 이상 후계자 선정을 미룰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여동생의 아들 히데츠구를 양자로 들이고.. 2023. 4. 30.
귀주 전투 고려의 왕 왕순은 개경에 접근한 거란족을 봤다. 지난번, 거란족이 침입했을 때, 왕은 수도 개경을 뒤로하고, 전라도로 피난을 갔었다. 그리고 그는 피난길에서 무수히 많은 치욕을 겪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고려의 왕은 이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두 번이나 도망칠 수는 없었다. 왕은 백성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결사항전을 다짐하였다. 1. 거란의 발흥 한국에서 후삼국시대가 전개되고 있을 때,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발흥하여 요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일대와 몽골초원을 지배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연운 16주마저 차지하였다. 한편, 그때 당시 중국은 5대 10국 시대로서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후주의 장군 조광윤이 후주의 어린 황제로.. 2023. 4. 30.
비수 전투 장안으로 돌아가는 전진의 황제 부견은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가 않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자신은 백만 대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백만 대군으로 동진까지 정벌한다면 중국전역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터였다. 그러나 고작 8만 명에게 자신의 백만 대군이 패배하였다. 왕맹이 동진을 정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 몹시도 통탄스러웠다. 1. 북중국 통일 기원후 383년경, 전진의 황제 부견은 한나라 이후 분열되어 있었던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한족이 아닌 저족 출신이었지만 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명재상 왕맹을 얻었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으며, 장강 이북과 서역을 모두 차지하였다. 더군다나 사천지방도 이미 부견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다. 이제 통일.. 2023. 4. 30.
오장원 전투 “폐하, 소신에게 역적 토벌과 한 황실의 부흥을 맡겨주시고, 그를 완수하지 못할 시엔 그 죄를 묻고, 선황의 영령 앞에 고해주십시오. 폐하, 스스로 잘 살피셔서 옳은 방책을 취하시고, 바른 말을 가려들으시며, 선황의 유조를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폐하의 큰 은혜에 소신은 망극할 따름입니다. 멀리 떠나면서 글을 올리려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 융중대 제갈량은 융중에서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형주와 익주, 그리고 한중을 석권하고, 오나라와 연합하며, 때를 기다린 채, 위나라에 변란에 일어나면, 군대를 일으켜 관중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절대적 열세에 놓여있는 유비의 세력은 조조의 세력과 대등해지고, 그리하면 유비의 천하통일은 분명 큰 가.. 2023. 4. 30.
해하 전투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오자, 항우가 말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하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이에 우희가 답하였다. “한군이 이미 천하를 다 빼앗으매,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1. 패왕 항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중국 전역을 가혹한 법으로 통치하였다.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익숙지 않았던 과거 육국의 백성들은 이에 큰 불만을 품었다. 그리하여 진시황제 사후, 중국 각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노력으로 진나라는 겨우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나라 땅에서 .. 2023. 4. 29.
애산 전투 늙은 신하가 말했다. “이제 사직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바, 존망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선 오랑캐들에게 사로잡혀 욕을 당하시느니, 차라리 이 노신과 바다에 몸을 던져 순국하시어, 구천에 계신 조종조를 뵘이, 대송의 천자로서 떳떳한 바가 될 것 입니다.” 그러자, 어린 황제는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라고 외치며 늙은 신하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 1. 송나라의 몰락 송나라는 조광윤이 건국한 나라로서 5대 10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송나라는 번영하였고 전성기 때의 인구는 무려 1억 명에 육박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업이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활발한 상업활동으로 수도 개봉은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대도시가 되었고, ‘불야.. 2023. 4. 29.
제20차 콘스탄티노플 전투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성안으로 쏟아지는 오스만의 군대를 보았다. 그는 황제가 될 때부터 이미 이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때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자주색 망토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칼을 쥔 채, 홀로 용감하게 오스만군에게 돌격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병사들과 자신의 제국과 자신의 콘스탄티노플과 운명을 함께 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었다. 1. 콘스탄티노플 그 옛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천명한 이래, 이 도시는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무려 1,100년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해상교역로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이 도시는 도시 중의 여왕이었으며,.. 2023. 4. 29.
제2차 비엔나 전투 마침내 성벽이 무너졌다. 오스만군의 2달에 걸친 포위공격으로 비엔나 성벽이 무너졌다. 무너진 성벽 틈으로 오스만군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비엔나의 방어군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비엔나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이곳이 함락된다면, 오스만군이 서유럽으로 거침없이 진군할 터였다. 그러나 오스만군의 후방에 그들이 등장했다. 날개 달린 전사들, 윙드 후사르였다. 1. 동군연합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대로 정략결혼으로 가문의 영지를 넓혀왔고, 그럼으로써 거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다. 이런 거대한 영토는 대외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불리었다. 그 영토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이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불릴지라도 그 영토들이 하나로 통일된 중앙집.. 2023. 4. 29.
하틴 전투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기 드 뤼지냥은 목이 말랐다, 더웠다, 매캐한 연기로 눈마저 매웠다. 가까이에 갈릴리 호수가 있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갈릴리 호수에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이미 살라딘의 군대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왕국군의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그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국왕 근위대도 살라딘군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둘씩 살라딘군의 칼아래 쓰러져 갔다. 1. 아이유브 왕조의 성립 1174년, 살라딘이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정복하였다. 이어서 그는 장기 왕조마저 손에 넣었다. 이로써 살라딘은 이집트와 시리아까지 지배하였고, 자신의 왕조를 세웠다. 역사상 아이유브 왕조라 불린 왕조였다. 그리고 그 아이유브 왕조의 한가운데에는 십자군이.. 2023. 4. 29.
레욱트라 전투 테베군이 승리하였다. 그것도 그리스 최강의 스파르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테베군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신성부대의 병사들도 서로의 연인을 껴안고 승리를 자축하였다. 신성부대가 없었다면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테베군을 이끈 에파미논다스의 혁신적인 전술이 거둔 승리이기도 하였다. 에파미논다스에게 그 순간만큼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1. 배경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리로 전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전쟁의 승리로 교만해졌고, 동맹국들에게 과두정부를 세울 것을 강요하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스파르타의 행태는 동맹국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전쟁의 패배 이후, 스파르타가 세운 과두정부가 들어서 있었는데, 스파르타가 패권을 쥔.. 2023. 4. 29.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이수스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2년 동안 그는 지중해 동부 해안 일대와 이집트를 누비며, 그곳들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어서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은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소집하였다. 결국 양국의 군대는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격돌하였다. 1. 양군의 규모 마케도니아군의 총병력은 47,000명이었는데, 구성은 중장보병이 31,000명으로 세부적으로는 장창병 12,000명, 방패병 3,000명이었고, 그밖에 그리스 동맹군이 7,000명, 그리스 용병이 9,000명이었다. 아울러 경보병은 9,000명, 중기병은 5,000명, 경기병은 2,000명이었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용병 .. 2023. 4. 29.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병사는 그날을 떠올렸다. 청동투구와 흉갑, 정강이받이로 온몸을 무장한 아테네의 중장보병들이 왼손에는 거대한 원형방패를 오른손에는 긴 창을 꼬나쥔채 자신들에게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페르시아 궁수들이 열심히 사격을 가했지만 그 무시무시한 청동괴물들은 아랑곳하지 하고 페르시아 병사들을 무참히 살육하였다. 페르시아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로 도망쳤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1. 폭풍, 흙, 물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그리스 원정을 명령하였다. 그것은 이오니아 반란에 개입했었던 괘씸한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492년에 그리스 원정군이 출발하였지만 아토스 곶에서 폭풍우를 만나 함대의 절반을 잃었고, 마르도니우스 장군도 트라키아에서 부상을 입게 되었다..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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