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신하가 말했다. “이제 사직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바, 존망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선 오랑캐들에게 사로잡혀 욕을 당하시느니, 차라리 이 노신과 바다에 몸을 던져 순국하시어, 구천에 계신 조종조를 뵘이, 대송의 천자로서 떳떳한 바가 될 것 입니다.” 그러자, 어린 황제는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라고 외치며 늙은 신하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
1. 송나라의 몰락
송나라는 조광윤이 건국한 나라로서 5대 10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송나라는 번영하였고 전성기 때의 인구는 무려 1억 명에 육박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업이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활발한 상업활동으로 수도 개봉은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대도시가 되었고, ‘불야성’이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송나라도 만주지역에서 발흥한 금나라에게 패배해 북중국을 뺏겨 장강 이남으로 밀려났다. 장강 이남으로 도망친 송나라의 주요 인사들은 임안에 자리 잡고, 그곳에서 새로운 송나라를 세우니, 역사에서는 이를 남송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남송마저 몽골 초원에서 발흥한 원나라의 말발굽에 무참히 무너졌다. 남송의 황제 공제는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압송되었고, 남송은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2. 송말삼걸
그러나 남송에게는 3명의 충신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이었고, 일명 송말삼걸이라 불리었다. 그들은 송나라 부흥의 의지를 불태우며,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였다. 끌려간 황제의 동생으로 남송의 단종이었다. 그들은 남송 저항군을 이끌고, 지속적인 저항활동을 벌였지만 상황은 시시각각 나빠져만 갔다. 급기야 단종이 병으로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단종의 동생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니, 그가 남송의 소제이다. 그들은 몽골초원에서 발흥한 원나라군이 육지에서는 강하지만 바다에서는 약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거점을 해안가로 이동시켰다. 장세걸과 육수부는 어린 황제와 함께 함대를 이끌고 해안가를 돌아다니며, 저항활동을 이어갔다. 아울러 문천상은 내륙에 남아 저항하였지만 이내 원나라군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3. 애산으로
한편 원나라군은 이미 항복한 한족 병사들과 장수들로 수군을 만들어 놓았다. 남송저항군에게 이것은 참으로 절망적인 일이었다. 원나라 수군은 남송저항군을 추격하며, 남송저항군의 해안거점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했다. 쫓기고 쫓기던 남송저항군은 마침내 애산에 상륙하였다. 애산은 섬으로서 대륙과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행궁과 요새를 건설하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애산에 황제와 남송저항군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의병들은 그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무려 20만 명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시씨 가문까지 황제를 지키고자 했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 이래로 송나라는 전 왕조의 황족인 시씨 가문의 안전을 보장하고, 대대로 우대하였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전 왕조의 황족들은 몰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송나라 황실의 처우는 매우 이례적이고 또한 인도적인 처사였다. 그리고 그런 시씨 가문이 조씨 황실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었다.
4. 포위전
그때 당시 남송저항군은 장세걸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천여 척의 대형선박들을 서로 연결하여 바다 위의 성처럼 만들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후 장홍범이 이끄는 원나라 수군은 장세걸의 함대를 공격하였다. 장홍범은 작은 배들에다가 땔감을 실은 후, 불을 붙여 남송저항군에게 돌진시켰다. 이른바 화공선이었다. 그러나 남송저항군 함대에 불은 붙지 않았다. 화공선 돌격을 이미 예상한 장세걸이 자신의 함대에 진흙을 발라놓았기 때문이었다. 화공선 공격이 실패하자, 장홍범은 압도적인 병력차를 이용해 애산을 포위하였다. 한편으로 장홍범은 장세걸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장세걸은 그것을 거부하고 끝까지 결사항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남송저항군의 사기는 낮아지고 있었다. 원나라군의 포위로 식수 및 물자의 보급이 차단되었고, 그로 인해 남송저항군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기간의 포위로 남송저항군의 피로가 극에 달하자, 원나라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5. 마지막 전투
원나라군의 화살비가 남송저항군을 덮쳤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남송저항군의 병사들은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이어서 수많은 원나라군 병사들이 남송저항군의 함대에 도선하였다. 남송저항군은 저항하였으나, 이미 중과부적이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것은 이미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남송저항군의 주요 인사들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절망하였다. 그들은 곧 하나, 둘씩 자결하였다. 그때 당시 육수부는 배 안에서 어린 황제에게 ‘대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은 제왕학의 개론서였다. 그는 이미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어린 황제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 황제의 어머니 양태후도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연명한 바는 조씨 황실의 골육을 보전키 위해서였거니와, 이제 일이 이 지경에 이른 바 내 살아 있은들 더 무엇하겠소?” 한편, 장세걸은 함대를 이끌고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태풍으로 인해 모두 몰살당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다음 날 바다 위에 떠오른 시신이 무려 십만여구에 달했다고 한다.
6. 최후의 충신
애산 전투 전에 원나라군의 포로가 되었던 문천상은 애산전투를 모두 지켜봤다. 그 후 그는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압송되었다. 그때 당시 원나라의 황제는 쿠빌라이였는데, 쿠빌라이는 문천상을 회유하고자 하였다. 문천상은 이 거부하였고, 쿠빌라이는 그를 5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 문천상이 감옥에 있는 5년 동안 쿠빌라이는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돌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문천상으로 인해 남송의 잔존세력들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쿠빌라이는 어쩔 수 없이 문천상에 대한 처형을 명령했으나, 얼마 안 가서 처형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으니, 처형은 이미 집행되었고, 문천상은 죽어있었다. 그리고 쿠빌라이는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렇게 남송 최후의 불꽃마저 꺼져버렸다.
7. 왕조의 흥망성쇠
애산전투의 결과로 원나라가 중국을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원나라는 채 백년이 지나기도 전에 명나라에 의해서 몽골초원으로 쫓겨갔다. 명나라는 주원장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은 애산전투에 참여한 어떤 병사의 후손이었다.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가 애산전투에서 원나라군과 싸웠던 것이다. 주원장의 외할아버지는 살아남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손을 남겼다. 그리고 그 자손들 중 한 명이 기어이 원나라를 몰아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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