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성벽이 무너졌다. 오스만군의 2달에 걸친 포위공격으로 비엔나 성벽이 무너졌다. 무너진 성벽 틈으로 오스만군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비엔나의 방어군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비엔나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이곳이 함락된다면, 오스만군이 서유럽으로 거침없이 진군할 터였다. 그러나 오스만군의 후방에 그들이 등장했다. 날개 달린 전사들, 윙드 후사르였다.
1. 동군연합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대로 정략결혼으로 가문의 영지를 넓혀왔고, 그럼으로써 거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다. 이런 거대한 영토는 대외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불리었다. 그 영토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이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불릴지라도 그 영토들이 하나로 통일된 중앙집권국가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 영토들의 주민들은 개별적인 공동체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의 왕위가 따로 존재했다. 단지 그 왕위들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겸임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시 말해 1명의 군주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연합해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형태의 연합을 보통 동군연합이라 불렀다. 굳이 현대에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여러 회사의 사장직을 겸임한다고 해서, 그 회사들이 하나의 회사가 아닌 것과 같았다.
2. 헝가리의 반란
한편,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 1세 이후로 계속 쇠퇴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합스부르크의 통치하에 있던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군은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때 당시 오스만 제국의 실권은 재상 카라 무스타파가 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제국 내부의 기강을 확립하며, 나아가 제국을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에 헝가리 반란군이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그는 술탄 메흐메트 4세를 설득하였고, 술탄 메흐메트 4세 또한 호전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오스만 제국은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켰다. 그렇게 오스만 제국의 15만 대군이 비엔나로 출병하였다.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지역인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다. 이로써 제2차 비엔나 전투가 벌어졌다.
3. 비엔나 포위
비엔나에 도착한 오스만군은 쉴레이만 1세 때의 비엔나 전투를 교훈 삼아 무리하게 공격하는 대신, 비엔나를 포위하였다. 비엔나를 고사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출병 전부터 포위전을 준비한 것이었기에 오스만군이 준비한 병력과 물자는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그때 당시, 오스만 제국의 국력에 비추어 본다면 이 같은 병력과 물자를 준비하고 또 유지하는 것은 국고에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렇기에 오스만군은 이 원정에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반드시 비엔나를 함락시켜야만 했다. 한편으로 비엔나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당시 비엔나의 방어병력은 1만 6천여 명으로 오스만군에 비한다면 턱없이 열세였다. 더군다나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 정치체제의 한계로 제국의 국력을 한 곳으로 온전히 모으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상태에서 비엔나가 함락된다면, 자칫 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의 군주 레오폴트 1세는 비엔나 절대사수를 천명하고,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스만군은 2달 동안 비엔나를 포위하였다. 긴 시간 동안 비엔나에 갇혀 지낸 시민들은 굶주림과 물자난으로 지쳐만 갔다. 그러나 비엔나의 시민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외부 구원군을 기다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4. 무너지는 성벽
한편, 그 무렵 유럽에서는 비엔나를 구원하기 위한 신성동맹이 결성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약 7만 4천여 명의 병력들이 모였다. 그들이 비엔나 인근에 도착했을 때, 오스만군은 다급해졌다. 그들이 비엔나에 도착하기 전에 비엔나를 함락시켜야만 했다. 오스만군은 곧 비엔나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있는 대로 포탄을 쏘아댔고, 동시에 여러 곳에 땅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렸다. 그러자 굳건했던 비엔나의 성벽은 여러 곳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스만 군은 그 무너진 틈으로 물밀듯이 공격해 들어갔고, 비엔나 방어군은 시가전을 준비하였다. 그렇게 비엔나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때 마침내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가 비엔나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윙드 후사르 기병대가 오스만군에게 돌격하였다.
5. 윙드 후사르
윙드 후사르, 등 뒤에 날개 장식을 단 중장기병들이 무려 5m의 랜스를 앞으로 향한 채, 오스만군에게 맹렬하게 돌격하였다. 비엔나 함락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오스만군은 윙드 후사르 기병대를 상대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윙드 후사르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오스만군은 결국 후퇴하였다. 유럽 연합군은 후퇴하는 오스만군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오스만군을 집요하게 추격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영토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6. 전투 결과
오스만 제국은 엄청난 국력을 소모했음에도 비엔나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위신은 곤두박질쳤다. 더 이상 유럽을 공포로 떨게 했던 그 옛날의 오스만 제국이 아니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오스만 제국은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전투의 패배로 오스만 제국에서는 술탄 메흐메트 4세와 재상 카라 무스타파가 몰락하였다. 술탄 메흐메트 4세는 폐위되었고, 재상 카라 무스타파는 처형되었다.
7. 커피의 유행
한편으로 이 전투로 인해 본격적으로 커피가 유럽에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만 하더라도 커피는 귀족들도 가끔 마시는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전투 이후 유럽 연합군은 오스만군의 전사자들 및 포로들로부터 대량의 커피원두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그때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커피가 사치품이었지만 오스만군에게는 커피가 일종의 보급품이었다. 대량의 커피 원두를 얻은 비엔나 시민들은 곧 커피 맛에 매료되었고, 커피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8. 크루아상
또한 이때, 크루아상이 만들어졌다. 비엔나 전투 당시, 오스만군이 비엔나를 향해 갱도를 팠는데, 지하실에 있던 비엔나의 어떤 제빵사가 이 소리를 듣고, 급하게 방어군에게 알렸고, 방어군은 당장 달려가서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후 이 제빵사의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훈장을 받았고, 제빵사는 이것을 기려 크루아상을 만들었다. 그것은 오스만을 상징하는 초승달 모양을 본떠 만든 빵이었다. 이후로 오스트리아인들은 크루아상을 씹어먹으며, 그날의 승리를 기억한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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