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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하틴 전투

by 황금나무(Golden Tree)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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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기 드 뤼지냥은 목이 말랐다, 더웠다, 매캐한 연기로 눈마저 매웠다. 가까이에 갈릴리 호수가 있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갈릴리 호수에 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이미 살라딘의 군대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왕국군의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그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국왕 근위대도 살라딘군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둘씩 살라딘군의 칼아래 쓰러져 갔다.

 

1. 아이유브 왕조의 성립

1174년, 살라딘이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정복하였다. 이어서 그는 장기 왕조마저 손에 넣었다. 이로써 살라딘은 이집트와 시리아까지 지배하였고, 자신의 왕조를 세웠다. 역사상 아이유브 왕조라 불린 왕조였다. 그리고 그 아이유브 왕조의 한가운데에는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이 있었다. 살라딘의 세운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고, 예루살렘 왕국은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그때에도 두 종교의 사이는 무척이나 나빴다. 결국 두 나라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2. 두 왕의 평화

한창 기세가 오른 살라딘은 군대를 일으켜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였으나,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4세에게 몽기사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양국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잠시나마 두 종교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전투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4세는 왕국과 이슬람 세력 사이의 평화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보두앵 4세는 젊고 유능했지만 불행했다. 운명이 그에게 문둥병이라는 시련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 왕국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였다. 그러나 이런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깨고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이 있었다. 안티오크의 공작이자, 케락의 영주였던 르노 샤티용과 그가 이끄는 십자군 기사들은 왕의 협정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공공연히 이슬람교도들을 공격하였다. 왕은 이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결국 병이 악화되어 1185년에 사망하였다.

 

3. 흔들리는 평화

왕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의 누이인 시빌라 공주의 어린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 소년왕은 재위기간을 채 1년도 못 채우고 사망하였다. 결국 예루살렘의 왕위는 시빌라 공주의 남편 기 드 뤼지냥에게 넘어갔다. 새로운 국왕의 즉위는 예루살렘 왕국의 궁정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왕 지지파와 반대파간의 갈등이 극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무력충돌로까지 번질 뻔했다. 다행히 이벨린의 영주 발리앙이 둘 사이를 중재하였고, 가까스로 내전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한편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살라딘과 개인적으로 휴전협정을 맺었다. 살라딘은 레몽의 영토에 자신이 군대가 통행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레몽은 이를 수락하였다. 그즈음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지도부가 레몽 3세의 영토로 가고 있었다. 이는 국왕 반대파였던 레몽 3세와 기 왕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라딘군과 조우하게 되었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숫적 열세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오직 성전기사단장을 포함한 4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로써 전쟁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과 살라딘 사이에서 전운이 감돌았다.

 

3. 살라딘의 유인

양국은 군대를 소집하였다. 한편 살라딘은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가 세운 아이유브 왕조의 구조적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의 왕국은 중앙집권 국가가 아닌 지방분권 국가로 살라딘을 지지하는 여러 지방 영주들의 연합체였다. ‘성전’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운다면, 그들이 잘 따르겠지만 살라딘이 우려하는 것은 전쟁의 장기화였다. 전쟁이 길어지고 추수철이 다가오면 영주들이 이탈할 것이라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군을 사막으로 유인하여 그들을 섬멸하기로 하였다. 살라딘은 우선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였다. 티베리아스는 레몽의 영지로서 병사들이 얼마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곳을 점령하는 것은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를 유인하고자 했던 살라딘은 티베리아스의 외성을 점령한 후, 내성을 바로 점령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예루살렘 왕국 궁정은 이 소식을 듣고, 티베리아스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정작 티베리아스의 영주 레몽은 이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이것이 살라딘의 계략임을 눈치챘던 것이다. 비록 그의 부인이 티베리아스의 내성에 남아있었지만 그는 왕국을 위하여 출병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비겁한 겁쟁이라고 매도 당하였으며, 결국 예루살렘 왕국군은 티베리아스로 진군하였다.

 

4. 양군의 규모

예루살렘 왕국은 성전기사단 및 구호기사단을 비롯한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였다. 예루살렘 왕국군의 병력규모는 총 20,000여 명으로 기사 1,200명, 중장보병 3,000명, 투르크 기병 500명, 일반보병 15,000명으로 구성되었다. 반면, 살라딘의 군대는 대략 3만여 명이었고 상당수가 기병이었다. 그 기병들은 아랍, 베두인, 튀르크 민족들의 궁기병 및 경기병들이었으며, 살라딘의 직속기병 및 살라딘 휘하의 영주들이 데리고 온 기병들이었다. 이 밖에 보병은 이집트 보병들이 주를 이루었다.

 

5. 더위와 갈증

예루살렘 왕국군은 1187년 7월 3일 세포리아에서 출발했다. 굳이 수원이 있는 곳을 떠난 것이었다. 살라딘의 궁기병들은 예루살렘 왕국군이 출발할 때부터 그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예루살렘 왕국군의 피해는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병력들이 갑옷과 큰 방패로 중무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군속도가 느려지는 효과는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군이 행군하는 곳은 여름 한낮의 강렬한 태양빛이 내려쬐는 사막이었다. 더위와 갈증 속에서의 행군은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고, 살라딘군 궁기병들의 공격은 그들을 더욱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군이 거의 반나절을 행군한 끝에 마침내 우물을 찾을 수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티베리아스까지는 거리가 있었기에 그들은 이내 행군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살라딘의 기병들이 그들을 공격하였고, 그들은 결국 어떤 언덕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곳의 이름은 하틴의 뿔이었다.

 

6. 예루살렘 왕국군의 궤멸

예루살렘 왕국군은 더위와 갈증으로 이미 지쳐있었다. 그리고 살라딘은 이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살라딘군은 불을 지피기 시작했고, 그 불로 인한 매캐한 연기가 예루살렘 왕국군을 덮쳤다. 가까운 거리에 갈릴리 호수가 있었지만 이미 살라딘의 군대가 예루살렘 왕국군을 포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군의 기사들은 호수를 향해 돌진하였다. 그러나 이 돌진으로 인해 보병대와 기병대 등 각 부대들의 연결이 느슨해져 버렸다. 그러자 살라딘군은 예루살렘 왕국군의 각 부대를 각개격파해 버렸다.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근위대는 최후까지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궤멸을 피할 수는 없었다.

 

 

7. 전투 결과

예루살렘 왕국군은 약 3,000명이 생존하였다. 거의 전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지휘관들도 포로가 되었다. 반면 살라딘군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더 이상의 방어병력이 없었던 예루살렘 왕국은 결국 멸망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프랑스 왕국의 존엄왕 필리프 2세, 잉글랜드 왕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신성 로마 제국의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 등을 중심으로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이른바 왕들의 십자군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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