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베군이 승리하였다. 그것도 그리스 최강의 스파르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테베군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신성부대의 병사들도 서로의 연인을 껴안고 승리를 자축하였다. 신성부대가 없었다면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테베군을 이끈 에파미논다스의 혁신적인 전술이 거둔 승리이기도 하였다. 에파미논다스에게 그 순간만큼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1. 배경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리로 전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전쟁의 승리로 교만해졌고, 동맹국들에게 과두정부를 세울 것을 강요하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스파르타의 행태는 동맹국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전쟁의 패배 이후, 스파르타가 세운 과두정부가 들어서 있었는데, 스파르타가 패권을 쥔 지 1년 만에 아테네에서는 과두정부가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또한 오랫동안 스파르타의 동맹이었던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 테베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2인자, 코린트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이 스파르타에 대항함으로써 코린토스 전쟁이 일어났다.
2. 스파르타군
당시 스파르타군은 그리스 최강의 정예들로 지상에서는 그들을 대적할 군대가 없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군사훈련에만 매진했고, 거의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다. 스파르타의 인구는 전통적으로 적었으나, 거의 모든 남자들이 군인이었고, 그들 하나하나가 탁월한 전사들이었다. 스파르타는 이런 전사들을 바탕으로 전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베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신성부대가 있었다.
3. 신성부대
신성부대는 150쌍의 남성 동성애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의 나이는 대체로 20~30세 정도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성인 남성과 청소년의 동성애 문화가 비교적 널리 퍼져있었는데, 그들은 연인관계이면서 동시에 사제관계이기도 했다. 신성부대는 바로 이 연인 및 사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성부대의 병사들은 스스로의 연인, 스승, 제자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 다시 말해 ‘사랑의 힘’을 전투력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그것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그들의 사기는 드높았고, 전우애는 충만하였으며, 전투력은 굉장히 강하였다. 그들은 여타 시민병들과는 다르게 평시에도 군사훈련에 매진하였고, 생활은 국비로 지원되었다. 따라서 신성부대는 전문 직업군인들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특수부대였다. 이들의 훈련 수준은 굉장히 높았고, 그 운용방식 또한 다양하였다. 신성부대는 여러모로 스파르타의 병사들과 비교되었는데, 스파르타의 병사들이 어린 시절부터 거의 죽을 때까지 평생을 병영생활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하는 반면, 신성부대는 소수정예로서 ‘사랑의 힘’이라는 자발적인 동기부여로 훈련 및 전투에 임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훈련 효율은 스파르타군보다 높았다.
4. 그리스의 밀집방진
그때 당시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밀집방진에서 병사들은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창을 들었다. 이렇게 되면 각 병사들의 우반신이 노출되는데, 병사들은 노출된 우반신을 자신의 우측 병사의 방패 뒤로 밀착시켜 방어하였다. 병사들은 전진 중에 가능하면 최대한 오른쪽으로 자신을 몸을 밀착시키려 했는데, 이는 개별 병사들의 방어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전진하는 밀집방진은 오른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기에 양군이 전진하게 되면 양군의 밀집방진은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였다. 이에 따라 그리스의 밀집방진은 전투시 우익이 상대적으로 좌익과 중앙에 비해 돌출되곤 하였다. 그리스의 장군들은 이 돌출된 우익에 최정예 병력을 배치하였는데, 돌출된 우익의 정예병력이 승리의 관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아군 우익이 최대한 빨리 적의 좌익을 격파하고, 동시에 아군 좌익이 적 우익의 공격을 최대한 오래 버텨야 했다. 그럼으로써 적의 정예가 배치되어 있는 적 우익을 아군이 포위섬멸할 수 있었다.
5. 사선대형
그런데 테베군을 지휘하는 에파미논다스는 이것을 뒤집어 버렸다. 그는 우익이 아닌 좌익을 강화하였는데, 종심 50열을 편성하여 스파르타군 우익의 4배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하였다. 동시에 신성부대가 좌익의 좌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에파미논다스는 중앙과 우익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그는 강화된 좌익을 돌출시키면서 전체적으로 병력들을 사선으로 배치하여 전진시켰다. 이는 테베군의 병력이 집중배치된 테베군 좌익이 스파르타군 우익을 격파할 때까지는, 테베군 중앙 및 우익과 스파르타군 중앙 및 좌익의 교전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스파르타군도 테베군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돌출된 테베군 좌익의 좌측면을 포위해서 격파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런 스파르타군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테베군의 극좌익에 배치되었던 신성부대가 테베군의 좌측을 방어하기 위해 격렬히 싸웠기 때문이었다. 만약 신성부대가 없었다면 테베군 좌익은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력인 좌익이 스파르타군 우익을 격파할 때 즈음, 시간의 차이를 두고 테베군 중앙 및 우익이 스파르타군의 중앙 및 좌익과 전투를 벌였다. 테베군 중앙 및 우익이 스파르타군의 정면에서 싸우는 사이, 이미 스파르타군 우익을 격파한 테베군 좌익이 스파르타군 중앙 및 좌익의 측면을 강타하였다. 전투는 이미 이 시점에서 결정되었다.
6. 전투 결과
이 전투로 인해 스파르타는 500명의 중장보병들을 잃었다. 이는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의 25%에 달하는 수였다. 전통적으로 인구가 적었던 스파르타에게 이러한 손실은 치명적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스파르타는 패권을 상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다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한편, 이 전투로 인해 전술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 이는 에파미논다스가 보여준 혁신적인 전술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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