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잉글랜드의 기사가 군대를 사열 중이던 스코틀랜드 국왕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 공격을 피하고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리찍어버렸다. 이 모습을 본 스코틀랜드군의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고 사기는 드높아졌다. 왕은 도망자 생활을 할 때부터 몇 번이나 추격자와 배신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였다. 왕의 이름은 로버트 브루스,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한 구국의 영웅이다.
1. 로버트 브루스의 청야전술
폴커크 전투에서 패배한 스코틀랜드는 그 이후 잉글랜드와의 전면전을 회피했다. 새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2세가 2차례에 걸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청야전술에 당해내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잉글랜드는 우위에 있는 경제력 및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는 성과가 없었다. 상황은 점점 스코틀랜드에 유리해졌고, 급기야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자 잉글랜드는 군대를 보냈고, 스코틀랜드군은 산지로 도주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314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으로 스코틀랜드군의 전력은 계속해서 강화되고 있었고,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의 지역들을 하나둘씩 접수하고 있었다. 1314년 3월 끝내 에든버러 성마저 함락됨으로써 스코틀랜드 내에서는 보즈웰과 스털링 성만이 잉글랜드의 세력권으로 남아 있었다.
2. 잉글랜드의 내부갈등
그때 당시의 잉글랜드는 국왕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자칫 내전으로 번질 조짐마저 있었다. 이러한 잉글랜드의 내부사정으로 인해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는 자신들의 전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원했다. 그러던 중 1313년 10월경,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이사벨라 왕비의 중재를 받아들여 국왕에게 사죄하고, 에드워드 2세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잉글랜드 내부의 갈등은 잠시나마 해소될 수 있었다.
3. 잉글랜드 국왕의 친정
에드워드 2세는 이제야말로 스코틀랜드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확실하게 정복하고자 상당한 규모의 정벌군을 조직하였는데, 문제는 시간이 비교적 오래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스코틀랜드군은 스털링 성을 공격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 2세는 아직 준비가 덜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국왕 친정군은 2만 5천 명으로 스코틀랜드군의 8천 명과 비교하면, 거의 3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병력 규모였다.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있는 로버트 브루스는 스털링 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후퇴하려 했다. 그러나 로버트 휘하의 스코틀랜드의 영주들은 그것을 반대하며, 잉글랜드군과의 전면전을 감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여태껏 로버트의 게릴라 전술로 인해 스코틀랜드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인 승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누적된 영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잉글랜드군과의 전면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군의 3배 이상이었기에 함부로 전면전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로버트 브루스는 주력군을 보존하면서 소규모 전투를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뉴파크 숲의 입구와 배넉번 강 인근의 늪지 사이에서 잉글랜드군을 기다렸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결정될 터였다.
4. 전초전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전초부대를 발견하자 그들을 추격했고, 이어서 잉글랜드의 전위부대가 스코틀랜드군의 본대를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의 전위부대는 그 기세가 굉장히 맹렬했다. 급기야 헨리 드 보헌이라는 잉글랜드 기사가 랜스로 로버트 브루스를 공격했으나, 로버트 브루스는 이를 피하고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려찍어버렸다. 한 번의 위기는 있었으나, 왕의 건재를 과시함으로써 스코틀랜드군의 사기가 올라갔다. 이어서 두 방향에서 잉글랜드군 기병대가 돌격했지만 습지인 배넉번에서는 온전한 돌격력에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스코틀랜드군 보병들이 이미 장창벽을 형성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군은 3번이나 돌격을 감행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5.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다음날, 잉글랜드군은 자신들이 병력규모에서는 유리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군이 먼저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한 예상하에 잠시 공격을 중지하고, 전황을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스코틀랜드군은 그들의 예상외로 움직였다. 숲에 매복해 있던 스코틀랜드군 보병들이 궁수들의 엄호하에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비록 스코틀랜드 궁수들이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반격으로 후퇴했지만 이미 스코틀랜드군의 보병들은 잉글랜드군의 가까이에 와있었다. 그러자 잉글랜드군은 중장기병들을 출격시켰고, 스코틀랜드군 보병들은 장창벽을 형성하여 그들을 모두 패주시켰다. 그리고 이때, 로버트 브루스는 총공격을 감행했다. 비록 병력규모에서는 스코틀랜드군이 열세였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배넉번이었다. 배넉번은 개울과 잡목들로 가득하였기에 잉글랜드군은 진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였으며, 기병대 및 보병대가 뒤얽혀 혼란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잉글랜드군의 압도적인 병력우위는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장궁병들로 하여금 맹렬한 사격을 개시하였다. 그러자 스코틀랜드군은 큰 피해를 입기 시작했고, 자칫 폴커크의 참패가 재현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버트 브루스는 그동안 보존해온 기병대를 출격시켜 잉글랜드 장궁병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전황이 스코틀랜드군에게 유리해 보였으나, 잉글랜드군의 병력은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있었다. 따라서 장기전은 스코틀랜드군에게 불리할 터였다. 특히, 스코틀랜드군은 예비대까지 모두 동원한 상황이었다. 로버트 브루스는 후퇴한 자신의 궁병들을 다시 전장에 투입했다. 궁병들은 잉글랜드군에게 사격을 개시했고, 동시에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전면에서 버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기병들이 우회하여 잉글랜드군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그럼으로써 잉글랜드군은 붕괴하기 시작했고, 결국 패주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군의 승리였다. 폴커크 전투에서 패배한 이래로, 무려 14년 만에 잉글랜드군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7. 전투결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겨우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필사적인 근위대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는 살았지만 잉글랜드군은 1천여 명의 기사들과 절반의 보병들을 잃었다. 그만큼 잉글랜드한테는 참담한 패배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잉글랜드는 스털링성은 물론, 스코틀랜드 내의 거점을 모조리 내주어야만 했다.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왕권이 약화되었고, 귀족들을 주축으로 하는 의회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왕당파와 반왕당파로 갈려 투쟁하였고, 기근과 전염병이 유행하자, 잉글랜드 내부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해져 갔다. 한편으로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는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배넉번 전투의 승리로 스코틀랜드는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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