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이수스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2년 동안 그는 지중해 동부 해안 일대와 이집트를 누비며, 그곳들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어서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은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소집하였다. 결국 양국의 군대는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격돌하였다.
1. 양군의 규모
마케도니아군의 총병력은 47,000명이었는데, 구성은 중장보병이 31,000명으로 세부적으로는 장창병 12,000명, 방패병 3,000명이었고, 그밖에 그리스 동맹군이 7,000명, 그리스 용병이 9,000명이었다. 아울러 경보병은 9,000명, 중기병은 5,000명, 경기병은 2,000명이었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용병 8,000여 명, 이모탈 10,000명, 궁병 3,000여 명, 기병 40,000여 명, 낫전차 200대, 전투 코끼리 15마리와 수십만의 농민징집병들로 구성되었다.
2. 양군의 배치
페르시아군은 중앙에는 호위기병대, 이모탈, 그리스 용병대, 궁병들을 배치하였고, 좌우익에는 기병들을 양옆으로 길게 배치하였다. 후위에는 농민징집병들이 배치되었고, 전위에는 전차부대가 배치되었다. 페르시아군의 의도는 전차를 돌격시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좌우익의 기병대로 적을 포위하면서, 수십만의 농민징집병들을 돌격시킴으로써 마케도니군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반면, 마케도니아군은 중앙에는 중장보병들을 배치하였고, 좌우익에는 기병들을 배치하였다.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는 기병전력이 열세인 점을 만회하기 위해 양익의 페르시아 기병을 묶어놓고, 자신이 직접 페르시아군의 중앙으로 돌진하여 다리우스를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알렉산더는 중앙의 팔랑크스를 2중으로 배치하고 사선형태로 진군하게 하였다.
3. 전투 초반
마케도니아군이 진군해 오자, 페르시아군은 전차를 출격시켰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군은 이들을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전차는 그 특성상 방향전환이 어렵고, 직진만 할 수 있었는데, 마케도니아군은 전차가 그냥 지나가도록 틈을 만들어주었고, 전차는 그대로 전장을 이탈해 버렸다. 동시에 페르시아군 좌우익의 기병들이 출격하였다. 그러는 동안 마케도니아군 중앙의 팔랑크스는 계속 전진하였다. 페르시아군의 그리스 용병대 및 이모탈들이 이들을 막아서고, 페르시아 궁병들이 그들을 사격하였지만 마케도니아군 중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마케도니아군 중앙의 팔랑크스들은 계속 전진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측면을 보호해 주던 좌익과의 연결이 느슨해져 버렸다. 그리고 이틈을 페르시아군 기병대가 포착하여 파고들었다. 동시에 마케도니아군 좌익은 이미 전면에서 페르시아군 우익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페르시아군 기병들이 우회하여 후미를 공격한다면, 마케도니아군 좌익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러나 후위의 예비대가 기동하여 반격했고, 좌익은 다행히 한 차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후 좌익을 담당하던 백전노장 파르메니온은 좌익의 붕괴를 염려하여 알렉산더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4. 왕중왕의 위기
한편, 알렉산더는 직접 말을 타고 기병들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 알렉산더를 페르시아의 장군 베수스가 기병들을 이끌고 추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기병들은 알렉산더를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그만 페르시아군 좌익과 마케도니아군 우익의 싸움에 휘말려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마케도니아군 중앙이 페르시아군 중앙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었고, 페르시아군 좌익기병들도 마케도니아군 우익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다리우스의 후방에 수십만의 농민징집병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멀뚱히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위대한’ 왕중왕의 위기였다.
5. 왕중왕의 도주
알렉산더는 중장기병들을 포함하여 가용한 모든 기병들을 이끌고, 다리우스에게로 돌진했다. 페르시아 좌익 기병들이 이를 발견하였으나, 마케도니아군 경보병들이 알렉산더의 후방에서 그들의 접근을 방해하였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더가 자신의 거의 바로 앞까지 돌진해 들어오자 크게 놀라버렸고, 이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왕중왕이 도주하자, 후방에서 관망하던 농민징집병들도 충격과 공포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군 중앙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페르시아군 좌익의 기병들도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는 기세를 몰아 다리우스를 추격하고자 했지만 바로 그때, 좌익을 지키고 있던 파르메니온의 전령이 도착해 구원을 요청하였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와 마케도니아군 좌익 사이에서 갈등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군대를 구하기 위해 좌익으로 달려갔다.
6. 전투 결과
여러모로 마케도니아군의 극적인 승리였고, 이수스 전투와 더불어 알렉산더의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병력면에서 열세였던 마케도니아군이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있었던 이유를 단 하나만 꼽는다면 답은 알렉산더 뿐이었다. 알렉산더의 군사적 천재성과 담력이 없었다면 마케도니아군의 승리도 없었다. 어쨌든 이 전투의 승리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하였다. 동시에 다리우스는 왕좌를 잃은 것은 물론,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도 잃어버렸다. 이후 그는 도망치다가 부하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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