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병사는 그날을 떠올렸다. 청동투구와 흉갑, 정강이받이로 온몸을 무장한 아테네의 중장보병들이 왼손에는 거대한 원형방패를 오른손에는 긴 창을 꼬나쥔채 자신들에게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페르시아 궁수들이 열심히 사격을 가했지만 그 무시무시한 청동괴물들은 아랑곳하지 하고 페르시아 병사들을 무참히 살육하였다. 페르시아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로 도망쳤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1. 폭풍, 흙, 물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그리스 원정을 명령하였다. 그것은 이오니아 반란에 개입했었던 괘씸한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492년에 그리스 원정군이 출발하였지만 아토스 곶에서 폭풍우를 만나 함대의 절반을 잃었고, 마르도니우스 장군도 트라키아에서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포기하지 않았고, 기원전 491년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사신들을 보냈다. 그들의 임무는 복종의 표시로 흙과 물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사신들은 다른 도시국가들의 흙과 물은 받아왔지만 아테네의 흙과 물은 받아올 수 없었다.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의 사신들을 처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2. 페르시아의 침략
다리우스는 분노했고, 다시 원정군을 편성하여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원정군은 로도스, 사모스, 낙소스를 거처 에우보이아 섬에 상륙하였고, 이오니아 반란 당시 아테네와 함께 반란군을 도왔던 에레트리아를 7일 만에 함락시켰다. 이어서 원정군은 아티카 반도로 출발하여 9월 1일에 마라톤에 상륙하였다. 그러자 다급해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15일이나 되어서야 군대를 출병시킬 수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에 아테네는 15일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스파르타의 구원군을 기다릴 수 없었던 아테네는 9월 3일 군대를 일으켜 마라톤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아테네 식민도시들의 지원병들 및 플라타이아이의 병사들도 마라톤으로 집결하였다.
3. 양군의 규모 및 배치
아테네 연합군과 페르시아 제국군은 9월 3일부터 11일까지 9일간 마라톤에서 대치하였다. 아테네의 연합군은 약 10,000명의 중장보병들로 구성되었다. 페르시아군은 약 25,000명의 보병들과 기병 2,0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은 바다를 옆에 두고 병력을 배치하였다. 비교적 병력규모가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정예보병들을 배치하였고, 좌우익에는 궁병 및 방패병들을 배치하였다. 반면 아테네군은 중앙을 얇게 하여 4열로 배치하고 대신에 좌우익을 강화하였다.
4. 전투 진행
전투초반, 아테네군은 서서히 페르시아군에게 접근하였다가, 적과의 거리가 200m 정도로 좁아졌을 때,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이는 페르시아군의 화살공격을 최대한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테네군은 잘 싸우고 있었지만 비교적 얇았던 아테네군 중앙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고 있었다. 급기야 페르시아군이 아테네군의 중앙을 돌파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페르시아군 중앙의 정예보병들은 적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한편으로 아테네군 좌익이 페르시아군 우익을 격파하고, 이어서 아테네군 우익도 페르시아군 좌익을 격파해 버렸다. 그럼으로써 페르시아군 중앙의 양측면이 노출되었고, 아테네군의 좌우익은 페르시아군 중앙의 노출된 양측면을 그대로 공격하였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붕괴하여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살아남은 페르시아군 우익의 병사들은 후방으로 도주하였지만 거기에는 넓은 습지가 있었고, 추격하던 아테네군은 이들을 전멸시켰다. 반면, 페르시아군 중앙과 우익의 살아남은 병사들은 함대로 겨우 도주하였고, 아테네군의 맹렬한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5. 아테네군의 기동
아테네군이 승리하였지만 승리의 기쁨을 마냥 만끽할 수는 없었다. 페르시아 함대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아테네군은 페르시아 함대가 우회하여 아테네를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따라서 아테네군은 중무장을 한 채로 3시간 만에 30km의 거리를 주파하여 아테네에 도착하였다. 아테네군이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페르시아 함대도 아테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아테네군의 모습을 확인한 페르시아 함대는 이내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6. 전투 결과
페르시아군의 전사자는 6,400여 명이었지만 아테네군의 전사자는 192명에 불과했다. 아테네의 대승리였다.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마라톤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리스의 독립은 유지되었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시 거의 모든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에 항복하였다. 단지 아테네, 에레트리아, 스파르타 등의 겨우 3개의 도시국가들만이 저항하였을 뿐이었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저 3개의 도시들만 박살낸다면, 그리스 정복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그 모든 것들이 어그러졌다. 또한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들이 단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10년 후 페르시아의 2차 침공 때, 전 그리스가 헬라스 동맹을 결성하여 페르시아 제국에 맞섰다. 한편으로 아테네 민주정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살아남았으며, 중장보병을 담당하는 시민들의 지위 또한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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