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강, 그 강은 본국 로마와 속주의 경계였다. 그 어떤 군대도 이 강을 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반란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그 앞에 있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카이사르의 등 뒤로는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수많은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 하나, 카이사르의 도하명령이었다. 이윽고 카이사르가 말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내전의 시작이었다.
1. 배경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 일파는 크게 당황했다. 그렇게 빨리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폼페이우스 일파는 수도 로마를 버리고, 그리스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였다. 카이사르는 해군 전력이 열세였기 때문에 당장 폼페이우스를 추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입성하여 집정관직을 획득한 후, 히스파니아로 출병하여 그곳을 평정하였다. 그럼으로써 폼페이우스의 대 카이사르 포위망의 일부를 무너뜨렸다.
2. 그리스로
한편, 폼페이우스의 함대를 지휘하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러자 폼페이우스 해군의 경계가 잠시 약화되었고, 그 틈을 노려 카이사르는 아드리아 해를 건넜다. 그리스에 상륙하기는 했지만 카이사르는 본국 로마로부터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아드리아 해를 비롯한 지중해의 제해권을 폼페이우스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둘 사이에서는 디라키움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테살리아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이를 추격하였다. 결국 카이사르군과 폼페이우스군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로마 공화국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3. 양군의 규모 및 배치
카이사르군의 구성은 군단병 22,000여 명, 기병 1,000여 명이었고, 폼페이우스군의 구성은 군단병 36,000여 명, 기병 7,000여 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폼페이우스군의 병력이 거의 2배였고, 특히 기병 전력은 7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은 8년 동안 갈리아 전쟁에서 단련된 정예병들이었다. 반면, 폼페이우스군은 이미 최고사령관 폼페이우스가 전투 지휘를 한지 오래되었고, 휘하 병력들도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다시 말해 폼페이우스군은 병력의 ‘양’에서 우세하였고, 카이사르군은 병력의 ‘질’에서 우세하였다. 폼페이우스군의 핵심전력인 7,000여 명의 기병들은 폼페이우스군의 극좌익에 집중 배치되었다. 아울러 폼페이우스군의 보병전력은 3등분되어 좌익, 중앙, 우익 순으로 배치되었다. 카이사르군도 비슷하게 배치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고참병 2천여 명을 별동대로 편성하여 극우익에 기병들과 같이 배치하였다.
4. 전투 진행
기원전 48년 8월 9일, 카이사르군의 중장보병들이 먼저 폼페이우스군에게 돌격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대응하지 않았다. 달려오느라 지친 카이사르군을 손쉽게 격파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카이사르군 중장보병들은 잠시 멈춰 대열을 정비하고, 다시 돌격했다. 폼페이우스의 예상은 여기서 한번 빗나갔다. 당대 지중해 최강이라 불린 카이사르군 중장보병들의 공격을 폼페이우스군 보병들은 잘 막아내고 있었다. 이윽고, 폼페이우스는 기병들에게 출격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그의 망치였다. 휘하 보병들이 카이사르군 보병들을 막아내는 모루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병들이 망치로서 카이사르군의 측면과 후방을 강타한다면, 승리는 폼페이우스가 거머쥐게 될 터였다. 폼페이우스군 기병들이 움직이자, 카이사르도 기병들을 출격시켰다. 그런데 카이사르군 기병들의 등 뒤에는 투석병들이 타고 있었다. 투석병들은 돌을 던져 폼페이우스군 기병들을 도발했고, 경험이 부족했던 폼페이우스군 기병들은 여기에 넘어가 그들은 추격했다. 그들이 거의 카이사르군 기병들을 따라잡았을 때, 매복해 있던 카이사르군 2천여 명의 별동대가 그들의 측면을 급습하였다. 그들은 혼란에 빠졌고, 곧 전장을 이탈하였다. 이 시점에서 폼페이우스군의 주력은 무력화되었다. 폼페이우스군 기병들의 전장이탈은 카이사르군에게 있어 그들의 측후방이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폼페이우스군의 측후방은 노출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익에서 지휘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적 좌익의 노출된 측면을 그대로 공격했고, 기병들은 폼페이우스군의 후방을 타격했다. 폼페이우스군은 급격하게 붕괴되었고, 카이사르군은 여세를 몰아 폼페이우스군 진영까지 공격했다. 그리고 이날 상승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처음으로 진영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5. 전투 결과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6천여 명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2만 4천여 명에 달했다. 반면, 카이사르군의 전사자는 2백여 명에 불과했다. 카이사르의 완승이었다. 폼페이우스군 기병대가 와해되었을 때, 최고사령관 폼페이우스도 전장을 이탈했다. 기병대가 와해되던 그 시점에 그는 이미 패배를 직감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카이사르에 사로잡히기 전에 동방으로 이동하여 병력들을 모아 다시 한번 카이사르와 싸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가 알려지자, 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로마의 속주들과 도시들, 그리고 동맹국들은 그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하였다. 쫓기던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 도착하였고, 결국 그곳에서 암살당했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즉 ‘위대한’ 폼페이우스라 불린 사람의 허망한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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