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군의 병사들은 교회 종을 힘껏 쳤다. 그 종은 신성 로마 제국군의 종군사제들로부터 스웨덴군의 병사들이 전리품으로 뺏은 것이었다. 그 종소리는 사방으로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스웨덴군의 병사들은 함성을 질러댔다. 그 종소리는 승리의 종소리였다. 신교군이 제국군으로부터 거둔 첫 승리였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하는가”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1. 배경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발발한 30년 전쟁은 어느덧 제3기에 접어들었다. 당시 30년 전쟁의 무대였던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리었는데, 이 신성 로마 제국은 하나의 단일한 국가가 아닌 여러 제후국들의 연합체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제후국들은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치열하게 투쟁하였으며, 주변국들도 이에 개입하여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전쟁은 줄곧 구교측의 우세로 진행되었으며, 신교측은 수세에 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2. 스웨덴의 참전
1630년 발트해의 상권과 신교도를 방위한다는 명분하에, 일명 북방의 사자왕이라 불리던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2세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독일을 침공하였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틸리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맞섰다. 틸리는 제국 최고의 장군으로 신앙심이 두터워 갑옷의 성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신교측 제후들은 구스타프의 참전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스웨덴군의 개입으로 신교측이 승리한다면, 구스타프가 그에 상응하는 영토를 요구하리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교측 제후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스웨덴군은 보급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스웨덴군을 도운 건 구교측이었다.
3. 마그데부르크의 참극
황제군 총사령관 틸리는 마그데부르크까지 퇴각해 황제군의 지배지역에서 스웨덴군을 공격하려 했다. 그런데 그 마그데부르크가 신교파 도시였다. 틸리는 마그데부르크의 견고한 방어를 3개월간의 공격으로 기어이 함락시켜 버렸는데, 도시를 함락한 후에 벌어진 약탈과 살육으로 약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학살소식은 곧 전 독일에 퍼져 제후들은 맹렬히 황제를 비난했으며, 많은 신교파 제후들이 구스타프를 지원하게 되었다. 신교파 제후들의 지원에 힘입어 구스타프 2세는 틸리군을 향해 진군하였으며, 신교파인 작센군과 연합하여 신·구교 양측의 군대가 드디어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4. 양군의 규모 및 배치
틸리군은 남쪽에 위치하여 3만 2천 명의 병력과 34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포진은 중앙에 17개의 테르시오를 횡으로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대를 배치하였다. 테르시오란 에스파냐에서 만들어진 방진대형인데, 한 오에 150명씩 하여 총 10개 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심은 창병이 그 둘레에는 소총병이 배치되어 창병을 지원했다. 방진의 사각에는 4개의 소총부대가 배치되었고 인원은 약 1,500명 정도였다. 스웨덴군은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3만 명의 병력과 10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스웨덴군은 틸리군에 비해서 화력이 월등히 우세했는데, 틸리군의 소총병 비율이 30% 정도라면 스웨덴군의 소총병 비율은 70% 정도였다. 게다가 스웨덴군의 소총성능이 틸리군보다 좋았기 때문에 틸리군이 1분에 1발을 쏠 때 스웨덴군은 3발을 쏠 수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연대포라는 소형포가 각 부대마다 배치되어 보병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구스타프는 이런 군대를 선형으로 배치하였으며, 후방에 예비대를 두고 양익에 기병대를 배치하였다.
5. 화력전
전투는 양군의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약 2시간 동안의 포격으로 틸리군은 상당한 피해를 보고 있었는데, 화력면에서 스웨덴군이 우세하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틸리는 아군을 전진시켰다. 틸리군이 전진하는 동안에도 구스타프는 계속해서 포격을 가했다. 틸리군의 테르시오가 근접해오자 스웨덴-작센연합군도 포격을 멈추고 보병으로 응전하였다. 보병들이 전투를 벌일 때 스웨덴군의 연대포도 불을 뿜었는데, 연대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틸리군의 병사들도 우수수 쓰러졌다. 연대포의 재장전이 이루어지는 사이에도 소총병들은 계속 사격을 하였다. 틸리군의 테르시오는 거의 궤멸직전의 상황까지 갔는데, 이런 상황에 틸리군 좌익기병대를 지휘하던 파펜하임이 독단으로 돌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펜하임이 지휘하는 5천기의 기병대는 곧 스웨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6. 작센군의 이탈
한편 틸리군 우익은 스웨덴군 좌익의 작센군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신교측 병력의 절반정도가 전장을 이탈한 것이다. 작센군이 패주함으로서 스웨덴군의 좌익이 노출되자, 틸리는 기회가 왔음을 포착하고 우익으로 테르시오를 전진시켰다. 스웨덴군의 좌측면을 공격하여 포위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작센군을 추격하는 기병으로 하여금 스웨덴군 후방을 공격하게 하면 전투는 틸리군이 승리하게 될 터였다.
7. 구스타프의 반격
그러나 구스타프는 후방의 예비대를 좌익에 투입하여 단시간에 진형을 새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스웨덴 배후를 공격하려 했던 틸리군 기병대도 스웨덴군의 예비기병대에 저지당했다. 이어서 구스타프는 직접 예비 기병 2개 연대를 이끌고 우익과 함께 반격에 나섰다. 먼저 구스타프의 기병대는 틸리군의 기병대를 격퇴하고, 순식간에 틸리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틸리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또한 틸리군 후방에 있던 대포를 확보하여 그 대포로 틸리군에게 포격을 가하였다. 거의 사방에서 틸리군이 공격을 당하자, 전황은 틸리군에 급격히 불리해지기 시작하였으며 틸리군은 곧 붕괴하였다.
8. 전투 결과
이 전투에서 틸리군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쳐 3만 5천 명 중 2만 6천 명의 병력손실이 있었다. 거의 전멸에 가까운 대패였다. 구스타프의 개혁의 성과를 증명한 전투였고, 연승을 하며 신교군을 몰아붙이던 제국군에게 제대로 한방을 먹인 전투였다. 그동안 연패를 거듭하며,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신교측에게 이 전투가 갖는 의미는 매우 각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 이후, 신교측은 대대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30년 전쟁의 기간 동안 신교측과 구교측은 서로 번갈아가면서 우세를 점했다. 그렇게 30년을 싸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전쟁의 장기화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바로 이 브라이텐펠트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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