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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아드리아노플 전투

by 황금나무(Golden Tree)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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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황제가 북방에 침입한 야만족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대 사건이었다. 제국은 그 이전에도 수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잘 극복해 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외국의 군대와 이민족들이 제국을 침범했지만 최종적인 승리는 언제나 로마 제국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이 패배는 가히 로마 제국 멸망의 전주곡이라 할만한 사건이었다.

 

1. 배경

서기 376년경 동방으로부터 침입해 온 훈족을 피해 서고트족이 동로마 황제 발렌스에게 로마 제국으로의 이주를 요청하였다. 발렌스 황제는 이를 수락하여 트라키아(오늘날의 불가리아)로 이주할 것을 허락하고 총독에게 원조를 명령하였다. 이때 당시 로마 제국은 군사력에 있어서 곤란한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발렌스 황제는 이들을 로마 제국에 편입시켜 인구증가와 군사력의 증대를 꾀하고자 했다. 그렇게 서고트족은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가 될 수도 있었다.

 

2. 서고트족의 반란

그러나 트라키아 총독은 다뉴브강을 건너온 서고트족을 핍박하였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에 서고트족은 트라키아 총독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트라키아 총독은 군대로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했고, 결국 패배하고 만다. 그러자 발렌스 황제는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증원군을 요청하고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서로 승패가 불분명한 채 2년이 경과한다.

 

3. 황제의 친정

그리고 378년 봄, 발렌스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발칸반도로 향했다.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증원군 사령관 리코메레스는 발렌스 황제에게 자신의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충고하였지만 발렌스 황제는 휘하의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의 말을 듣고 즉시 서고트족과 싸울 것을 결정하였다. 전투는 아드리아노플로부터 약 8마일 떨어진 북서쪽 구릉지에서 전개되었다. 로마군은 총 6만 명의 병력으로 중장보병 4만, 경기병 2만이었고 중장보병이 그 주력이었다. 발렌스 황제는 중앙에는 중장보병을 좌우익에는 기병을 배치하였다.

 

4. 황제의 전사

한편 서고트족은 이때 당시 기병이 없는 상황이었다. 로마군이 그처럼 빨리 진군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기병을 약탈에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서고트족은 구릉 위에서 4륜 마차를 원형으로 배치하여 대항하였다. 로마군은 구릉 남쪽에서 서고트족을 압박해 들어갔다. 전투초반은 서고트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았다. 로마군이 서고트족을 포위하느라 대열이 무너졌을 때 로마군 우익쪽에서 갑작스레 서고트족 중장기병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곧바로 로마군 우익기병에게 돌진하였고 갑자기 공격을 받은 로마군 우익기병은 패주하였으며, 뒤이어 로마군 좌익기병에게도 서고트족 중장기병이 들이닥쳤다. 마찬가지로 로마군 좌익기병도 패주했다. 이에 따라 로마군 중장보병의 좌우측이 비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때까지 수세에 있던 서고트족 경보병이 공세로 전환하였다. 이리하여 포위하던 로마군이 반대로 포위당한다. 전투는 이미 그 시점에서 결정되었고, 이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와 상당수의 로마군이 전사하고 만다.

 

5. 전투 결과

사실 아드리아노플 전투 자체는 뛰어난 전략전술에 의해서 벌어진 대단한 전투는 아니었다. 발렌스 황제의 경험부족과 자만, 그리고 서고트족 기병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전투를 결정지었다. 만약 발렌스 황제가 리코메레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로마군은 양쪽에서 서고트족을 협공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전투 이후 로마는 북방 야만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잃어버렸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결과로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고, 게르만족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때까지 로마 제국의 군사력에 밀려 국경을 침범하지 못한 많은 게르만족들이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가 패배하자, 무더기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게르만족의 이주는 결국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불러왔다.

 

 

6. 중세의 시작

이뿐만 아니라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전술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고대 그리스 이래 전쟁의 주역은 중장보병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중장기병으로 바뀌었다. 로마 군단은 시민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중장보병이 사라짐에 따라 시민도 그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고 농노로 전락하고 만다. 아울러 영주와 제후가 권력을 분점하는 중세 봉건제도가 그 싹을 틔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아드리아노플 전투로 인해 중세 봉건사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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