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셀주크투르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 앞에 끌려 나왔다. 그 남자의 이름은 로마누스 4세,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술탄이 황제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당신의 포로가 된다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 것이오?” 황제가 대답했다. “아마도 당신을 죽이고 콘스탄티노플 거리에 그대의 시체를 전시했을 것이오.” 그러자 술탄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릴 벌은 그것보다 더 무섭다오.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당신을 풀어줄 것이오.”
1. 배경
로마 제국 멸망으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세시대에,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동유럽에서는 비잔틴 제국이 오늘날의 중동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일어났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할 때 서로마 제국은 멸망한데 반해 동로마 제국은 중세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동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렸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로 개칭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은 이래로,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당나라의 장안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도시로 불릴 만큼 비잔틴 제국은 유럽의 강대국이었다.
2. 셀주크투르크의 발흥
한편 11세기 초, 중동에서는 이슬람 세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셀주크 투르크가 분열되어 있던 중동의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신흥강국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듯이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사이에도 전운이 감돌았다. 1064년에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두 나라의 완충지대라고 할 수 있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3. 비잔틴 제국의 반격
이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는 6만 대군으로 반격에 나섰고, 만지케르트로 진격하는 동안 타카네이오테스에게 3만의 병력으로 헬라트 요새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타카네이오테스의 군대는 알프 아르슬란의 군대에 패배하고 만다. 로마누스 4세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만지케르트로 진격했고, 처음 일으킨 군대의 절반가량으로만 알프 아르슬란과 싸워야만 했다. 1071년 8월 23일 비교적 쉽게 만지케르트를 점령한 비잔틴 제국의 군대는 이튿날에 식량 징발에 나갔다가 셀주크 투르크의 궁기병과 접촉했다. 비잔틴 제국의 기병대는 이들을 추격하다가 함정에 걸려 전멸했다. 또한 휘하 우즈족 용병대가 셀주크 투르크군한테 투항하였다. 전초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4. 양군의 배치
8월 26일 비잔틴군은 좌익은 브리엔니오스, 우익은 테오도레 알리아테스 그리고 중앙은 황제 로마누스 4세의 지휘아래 셀주크투르크군을 공격하였다. 또한 후위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군대가 포위되는 사태를 방지하였다. 그런데 이 후위를 황제의 정적인 안드로니쿠스 두카스가 지휘하였다. 셀주크 투르크군은 4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형으로 맞섰고 알프 아르슬란은 후위에 위치했다.
5. 유인 그리고 배신
셀주크 투르크군의 궁수들은 활의 사거리 내에 접근하여 비잔틴군을 공격했고, 셀주크 투르크군의 중앙은 좌우익이 비잔틴군을 공격하는 동안 계속 뒤로 물러섰다. 저녁이 되었을 때 황제 로마누스 4세는 뒤에 남은 진지가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는데, 알프 아르슬란은 바로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비잔틴군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갑자기 셀주크 투르크군이 물밀듯이 밀려오자 비잔틴군은 당황했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비잔틴의 군대는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유사시에 아군이 포위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후위에 있던 병력은 오히려 전장에서 이탈해 버렸다.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의 배신이었다. 오로지 좌익만이 곤경에 빠진 황제를 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6. 전투 결과
전투 이후 로마누스 4세는 알프 아르슬란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알프 아르슬란은 로마누스 4세를 정중하게 대하고 평화조약 체결 후에 그를 비잔틴 제국으로 돌려보냈다. 알프 아르슬란이 판단하기에 비잔틴 제국에 새 황제가 즉위하는 것보다, 로마누스 4세가 비잔틴 제국으로 복귀하여 평화조약을 지키는 편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반대로 비잔틴 제국으로 귀환한 황제는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의 반란군에 의해 폐위당하고, 실명형을 당한 뒤 유배지에서 눈의 상처가 덧나 숨을 거두었다.
7. 무너지는 제국
로마누스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미카일 7세는 셀주크 투르크와의 평화조약을 지키지 않았고,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틴 제국은 혼란에 빠져 방어선이 무너져 있었다. 셀주크 투르크는 이를 기회로 아나톨리아 지역(오늘날의 터키)으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고, 비잔틴 제국은 이 지역으로 밀고 들어오는 셀주크 투르크군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국토의 절반인 아나톨리아라는 주요한 곡창지대와 절반 이상의 인구를 잃었다. 비잔틴 제국에게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실은 치명타였고 이후 비잔틴 제국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반해 셀주크 투르크는 알프 아르슬란의 아들 말리크 샤가 시리아, 아나톨리아, 팔레스타인을 등을 정복하여 그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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