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바알 신전 안에는 한 아버지와 한 아들이 있었다. 그 아홉 살짜리 소년은 아버지 앞에서 맹세했다. 반드시 로마를 멸망시키겠다고. 훗날 이 소년이 저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에 침입했을 때, 로마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로마의 그 어떤 장군도 그를 대적할 수 없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로마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공포로 각인되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한니발, 로마인들이 사상초유의 국난이라 부른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인공이었다.
1. 배경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 저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 온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의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의 칸나이 평원에서 약 9만여 명의 로마군을 맞이한다. 이때 당시 한니발은 에스파냐에서부터 데려온 2만 6천 명의 정예병력과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용병 2만 4천 명을 포함하여 도합 5만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한편, 로마는 이미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강국 카르타고를 격파하여 지중해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런 로마에게 한니발이 도전해 온 것이었다.
2. 양군의 규모 및 배치
지금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집정관인 아이밀리우스와 바로가 이끈 로마군의 전력은 보병이 8만에 기병이 7,200명이었고,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이 4만에 기병이 1만이었다. 한니발은 전체병력은 열세였지만 기병의 양과 질은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 기병의 효과적인 활용이 전투의 향방을 결정했다. 로마군은 1만의 병력은 진지에 남겨두고 남은 8만 명을 전장에 투입하였다. 포진은 주력인 중장보병들을 중앙에 배치하고 우익에는 로마 기병들을, 좌익에는 동맹국 기병들을 배치했다. 이에 대응하여 한니발도 로마군과 같은 대형으로 포진했으나, 중장보병들을 양익에 배치하고, 중앙에는 갈리아 용병들을 로마군 쪽으로 활모양으로 휘게 배치했다. 극좌우익에는 로마와 같이 기병들을 배치하였다.
3. 로마군의 우세
전투초반은 로마군의 우세로 진행되었다. 이미 지중해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던 로마의 중장보병들이 한니발군에 그대로 돌진하였다. 이런 로마군에 대응하여 갈리아 용병들도 선전하였지만 점점 밀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기병전에서는 한니발 군이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한니발군 좌익의 갈리아 기병들이 세배의 병력으로 로마군 우익 기병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로마군 우익 기병들도 선전했으나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바로가 지휘하는 로마군 좌익 기병들은 병력이 비슷했기에 한니발군 우익의 누미디아 기병들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로마군 중앙의 중장보병들이 갈리아 용병들의 중앙을 압박해 들어갔다. 확실히 중앙의 보병전은 로마군이 우세하였다.
4. 기병전
그러나 양익의 기병전은 그렇지 못했다. 점점 밀리고 있던 2,400명의 로마군 우익 기병들은 6천 명의 한니발군 기병들에게 포위되어 결국 전멸당했다. 로마군 좌익 기병들도 한니발군의 누미디아 기병들의 뛰어난 승마술에 당해내지 못하여 패주하였다. 한편 한니발군 중앙의 활모양 진형은 로마군 중장보병들의 압박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역으로 휘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로마군 기병들이 패주하고 로마군 중장보병들이 너무 깊숙이 들어간 탓에 로마군의 양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양익에 있던 한니발군 중장보병들이 로마군 양측면에 그대로 돌입하였다. 이어서 한니발군 기병들도 로마군 후미에 돌입하였다.
5. 포위망 완성
이것이 바로 한니발의 전술이었다. 전체병력은 열세지만 우위에 있던 기병전력으로 대포위망을 완성한 것이다. 로마군은 포위되어 좁은 공간에 밀집되었으므로 병사들의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압사하는 이들도 생겼다. 또한 대형외곽의 병사들만이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 전체의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한니발군이 포위망을 점점 좁혀옴에 따라 패닉상태에 빠진 로마군은 하나둘씩 쓰러졌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6. 전투 결과
이날 로마군은 7만여 명이 전사하고 진지에 남아있던 1만 명은 포로가 되었다. 총사령관인 바로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현직 집정관인 아이밀리우스, 전직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전사하고, 80명의 원로원 의원들도 전사했다. 지금의 국회라고 할 수 있었던 로마 원로원의 정원은 300명인데, 그중 4분의 1이 전사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한니발군은 5,500여 명이 전사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갈리아 용병들이었다. 전사상 포위섬멸전의 교과서라 불리는 칸나이 전투 이후, 어떤 로마의 장군도 한니발에게 맞서지 못한 채 로마는 한니발군에게 유린당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로마는 지구전으로 맞섰지만, 스키피오가 등장할 때까지 무려 15년간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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