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에서 로마군을 내려다보았다. 로마군은 한창 진영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진영은 알레시아를 둘러싸고 있었고, 진영의 앞뒤로는 호와 해자, 방벽과 둔덕, 그리고 다양한 함정과 장애물들이 착실하게 설치되고 있었다. 마치 요새 같은 포위진이 차차 완성되어 갔다. 그 포위진의 목표는 한 명의 남자였다. 베르킨게토릭스, 최초로 카이사르에게 패배를 안긴 남자였다.
1. 배경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그 임기가 종료되자, 갈리아 남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게르마니아에 있던 헬베티족이 갈리아 중북부를 침입하자,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였다. 카이사르는 이 요청에 응하였고, 점점 갈리아의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카이사르는 입으로는 갈리아를 보호한다고 했지만, 그 행동에서 갈리아 지배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갈리아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갈리아족 및 벨가이족이 봉기했지만 카이사르의 의하여 모두 진압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계속되었다. 갈리아인들은 겨울에는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분산해서 주둔지를 세운다는 점에 착안하여, 로마군의 각개격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의 그런 시도마저도 모두 좌절시켰다.
2. 베르킨게토릭스의 등장
이러한 때에 아르베르니족의 족장 베르킨게토릭스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로마에 맞서자고 전 갈리아에 호소하였고, 이에 갈리아의 거의 모든 부족들이 봉기하였다. 가히 갈리아 최후의 저항이라고 불릴만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갈리아 전쟁초기부터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이었던 하이두이족까지 여기에 합류하였다. 한편, 로마군을 상대로 수성전을 펼치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청야전술을 부족장들에게 제안했다. 그것은 로마군 주둔지 주변의 도시들을 완전히 불태우고, 그 주민들을 로마군 주둔지로부터 먼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로마군 주위의 20여 개의 도시가 불태워졌다. 이로써 로마군은 보급이 거의 차단되었다.
3. 알레시아로
이어서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패배하자, 갈리아 부족들은 열광하였다. 이것은 일대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상승장군 카이사르한테서 그 ‘상승’이란 칭호를 빼앗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적들은 로마 원로원에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몇 달만 기다린다면 베르킨게토릭스는 승리할 터였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를 상대로 급하게 전투를 벌였고, 결국 패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단결력이 약한 갈리아 부족들이 언제 분열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카이사르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 베르킨게토릭스의 의도였다고 본다. 하지만 이때의 패배로 베르킨게토릭스는 대부분의 기병 전력을 상실했다. 그러자 베르킨게토릭스는 비교적 험준한 고지에 위치한 알레시아 성으로 들어갔고, 이어서 농성을 준비했다. 알레시아는 갈리아의 성지였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알레시아에 들어간 이유는 명확했다. 전 갈리아 부족들의 마음을 고취시키고, 전쟁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부족들과 로마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4. 카이사르의 위기
카이사르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승리했다고는 하나, 베르킨게토릭스의 청야전술로 보급이 차단되었고, 갈리아 부족들의 구원군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로마군이라는 배는 적대적인 갈리아라는 바다 아니, 폭풍우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 떠있는 듯 위태로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긴 시간이 걸리는 공성전을 감행하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행동이었다. 자칫 앞뒤로 포위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지금 당장 갈리아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그렇게 갈리아 전쟁 발발 7년째, 카이사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듯 보였다.
5. 이중 포위망
그러나 카이사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역사에 종종 등장하는 군사적 천재였고, 그 카이사르에게는 당대 최강의 로마군이 있었다. 그리고 이 로마군은 당대 가장 유능한 공병들이기도 했다. 카이사르 휘하의 5만여 명의 로마군은 알레시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병력들로 둘러싸는 것이 아니었다. 2줄의 참호와 1줄의 해자, 둔덕과 방벽, 각종 함정과 장애물들을 포위 진지 앞뒤로 한 달에 걸쳐 만들었다. 그것은 역사상 그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이중포위망이었다. 도넛모양의 포위진은, 동시에 알레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갈리아 부족들에 대한 방어진이기도 했다. 로마군이 포위진을 요새 수준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진지공사는 저지하기 위해 기병대를 내보냈지만 카이사르의 게르만족 기병대가 그들을 모두 격퇴했다. 이에 베르킨게토릭스는 기병대를 모두 도시 밖으로 내보내 갈리아 부족들에게 구원요청을 하였다. 포위진이 완성되면 꼼짝없이 갇혀 굶어 죽을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포위진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갈리아 기병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6. 갈리아의 단결, 그리고 비극
베르킨게토릭스가 고립되었다는 소식에 갈리아 부족들은 회의를 소집했고, 보병 25만 명, 기병 8천 명이 알레시아를 구원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한편, 알레시아의 식량이 떨어지자, 베르킨게토릭스는 비정한 명령을 내렸다. 바로 노약자와 여자, 어린이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보낸 것이었다. 이들은 로마군에게 항복하고, 자신들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로마군은 이들을 거부했다. 그렇게 그들은 양진영 사이에서 오고 가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드디어 갈리아의 대규모 구원군이 도착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구도였다. 갈리아족들이 로마군을 포위하고, 그 로마군이 알레시아를 포위한 2중 포위망이었다.
7. 전초전
전투가 시작되자, 로마군은 앞뒤로 공격받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쳐 갈리아인들은 카이사르의 포위진을 공격했고, 로마군은 그들을 모두 격퇴했다. 두 번의 공격이 모두 실패하자, 갈리아인들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여기서 로마군의 포위진에 돌격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지형정보를 취합하였는데, 포위진 북쪽에 넓은 언덕이 있어 그곳만 방벽이 건설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언덕이 넓었기 때문이었다. 갈리아인들은 그곳이 포위진의 약점이라고 판단하였다. 카이사르 또한 그곳이 취약하다고 생각하여, 2개 군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갈리아인들은 6만 명의 정예병력으로 그곳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8. 고지전
6만 명의 갈리아군이 야간에 우회하여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고, 정오를 기점으로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베르킨게토릭스 역시, 병력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전투는 전반적으로 격렬했다. 특히 북쪽 언덕 경사면에서의 전투는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로마군도 강했지만 언덕 위 6만의 갈리아인들도 정예였다. 게다가 그들은 언덕 위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병력이 상대적으로 우세하였기에, 전열과 후열의 병력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며 병력들이 지치는 것을 방지하였다. 카이사르도 북쪽 언덕의 전투가 불리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6개 대대를 급파하였다.
9.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동시에 카이사르는 진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이후 점점 갈리아인들의 공세가 약화되자, 카이사르는 각 부대에서 병력들을 차출하였고, 기병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 북쪽 언덕의 갈리아인들의 배후로 이동시켰다. 이어서 북쪽 언덕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라는 보고가 들어오자, 카이사르는 차출한 병력 11개 대대를 직접 이끌고 그곳으로 이동했다. 진홍색 망토를 걸친 카이사르가 북쪽 언덕에 도착하자, 전투는 한층 더 격렬해졌다. 전투는 오랜 시간 이어졌고, 마침내 카이사르의 기병들이 적의 후방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배후로 이동시킨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적들에게 돌진하였고, 앞뒤로 공격받은 갈리아인들은 곧 패주하였다. 북쪽 언덕의 6만의 갈리아 정예병력들마저도 패배하자, 알레시아의 있던 대부분의 갈리아인들은 전의를 상실하였다. 그들은 곧 철수했고, 다음날 베르킨게토릭스마저 항복하였다. 카이사르의 6만여 명의 로마군은, 갈리아 구원군 25만여 명, 베르킨게토릭스의 8만여 명, 도합 33만여 명의 갈리아 군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참으로 극적인 승리였다.
10. 전투 결과
알레시아 전투는 사실상 갈리아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었다. 로마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로마는 갈리아 지역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전투로 인해 라인강 서쪽의 역사가 결정되었다. 이 전투 이후,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갈리아는 로마화의 충실한 우등생이 되었다. 한편,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승리하자, 본토 로마인들은 카이사르에게 열광했다. 뿐만 아니라, 이 승리를 바탕으로 카이사르는 그 당시 로마 중앙정계를 주름잡았던 폼페이우스의 라이벌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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