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성안으로 쏟아지는 오스만의 군대를 보았다. 그는 황제가 될 때부터 이미 이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때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자주색 망토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칼을 쥔 채, 홀로 용감하게 오스만군에게 돌격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병사들과 자신의 제국과 자신의 콘스탄티노플과 운명을 함께 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었다.
1. 콘스탄티노플
그 옛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천명한 이래, 이 도시는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무려 1,100년간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해상교역로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이 도시는 도시 중의 여왕이었으며, 세계적인 도시였다. 전성기의 인구는 약 40만여 명이었고, 그중 외국인은 무려 8만여 명이었다. 또한 이 도시는 천혜의 요새로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고, 육지면은 그 유명한 테오도시우스의 삼중성벽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 도시는 지난 천년의 시간 동안 19번이나 적의 침략을 받았지만 함락된 적이 없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와 이 도시밖에 남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이 도시를 함락시킬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2. 메흐메트 2세
1451년 오스만 제국에는 새로운 술탄이 즉위했다. 메흐메트 2세, 19살의 젊고 야심만만한 술탄이었다. 그때 당시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를 영유하며, 사방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슬람을 믿는 제국의 정중앙에 그리스 정교를 믿는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영토와 아시아의 영토가 사실상 분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에게 그 도시는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많은 오스만인들은 그 도시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도시는 지난 천년동안 정공법으로 함락된 사례가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술탄은 즉위 초부터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천명하였고,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비록 많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그 반대를 모두 물리치고 마침내 출병하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함락은커녕 테오도시우스의 삼중성벽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3. 테오도시우스 삼중성벽
콘스탄티노플의 육지면에 건설된 테오도시우스 삼중성벽은 중세시대 내내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냈다. 그 성벽의 구조는 이름 그대로 삼중으로 이루어졌는데, 1차 방어선은 해자와 해자 뒤의 흉벽으로 이루어졌으며, 2차 방어선은 높이가 5미터 너비가 2미터인 외성벽, 3차 방어선은 높이가 12미터, 너비가 5미터인 내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외성벽과 내성벽은 각각 96개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수시로 적을 감시하고 견제하였다. 그 어떤 군대도 정공법으로 이 성벽을 넘을 수 없었다. ‘신의 채찍’이라 불리면서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아틸라조차도 이 성벽 앞에서 그냥 돌아섰으며, 수많은 이슬람 세력들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스만 제국의 젊은 술탄도 실패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1453년 4월 마침내 15만 명의 오스만 대군이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오스만 제국의 유럽수도 에디르네에서는 우르반 거포가 콘스탄티노플로 운반되고 있었다.
4. 우르반 거포
우르반 거포는 헝가리의 기술자 우르반이 만들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거포를 운반하기 위해서 황소 60마리, 관리인원 200명이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거포를 운반하기 위한 도로공사도 진행되었는데, 여기에 동원된 인원이 250여 명이었다. 이 거포의 길이는 약 8미터였으며, 무게는 19톤에 달했다. 이 거포의 포탄은 약 300kg의 돌덩이였으며, 그 사거리는 1.6km였다. 그러나 이 거포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발사 후 생기는 엄청난 열을 냉각시키기 위해서는 무려 3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루에 7발을 초과해서 포격할 수 없었다. 만약 무리해서 포격을 한다면 포 자체에 균열이 생겨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포가 전장에서 불을 뿜자,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3시간의 냉각 시간 동안 방어군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보수할 수 있었지만, 이 거포의 위력에 콘스탄티노플의 방어군 및 시민들의 심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5. 금각만
메흐메트 2세는 초조했다. 그는 포격뿐만 아니라, 휘하병력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파상공세를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이 함락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고민했고, 마침내 금각만에 주목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지형은 삼각형에 가까웠는데, 북서쪽은 육지로 이어져 있었고, 북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있었다. 남쪽면은 절벽으로 마르마라 해와 접해 있었으며, 북동쪽면은 금각만에 접해있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취약한 면은 금각만에 접해있는 북동쪽이었다. 만약 콘스탄티노플을 바다에서 공격한다면 금각만에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폭은 약 7km로 긴 쇠사슬로 봉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스만의 해군은 그 쇠사슬을 돌파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묘수를 생각해 낸다. 그것은 금각만 북쪽 갈라타의 숲을 통해 배를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육지로 배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곧 갈라타에는 기름칠된 통나무들이 놓여졌다. 이것은 배를 이동시키기 위한 지상통로였다. 1453년 4월 22일, 오스만군의 함대 중 절반이 갈라타를 통해 금각만으로 진입하였다. 콘스탄티노플 방어군은 경악했다. 그들은 금각만으로 오스만군의 함대가 들어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북동쪽의 성벽에는 소수의 보초병들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은 사방에서 공격받기 시작했다.
6. 천년제국의 멸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의 7천 명의 방어군과 5만 명의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피해도 심각했지만 오스만군의 병력손실도 점점 누적되고 있었다. 오스만군은 지하갱도까지 건설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더 이상의 전력손실을 감수할 수 없었던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1453년 5월 26일, 개기월식이 일어났다. 오스만군도 콘스탄티노플 사람들도 모두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오스만군에게는 길조였고,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에게는 흉조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에는 며칠간 엄청난 뇌우가 쏟아지고, 안개 또한 자욱했다. 또한 성 소피아 대성당의 꼭대기에는 붉은 빛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에게 흉조로 여겨졌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군은 최후의 공격을 시작했다. 자정부터 시작된 공격은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방어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이미 그들의 피로도는 극에 달해있었다. 결국 오스만의 군기가 성벽에 하나, 둘씩 나부끼기 시작했다. 곧 수많은 오스만군이 성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과 방어군은 그들의 칼날 아래 쓰러져 갔다. 성 소피아 대성당마저 오스만군의 손에 들어갔다. 58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천년제국이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7. 중세의 끝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함께 같은 해, 백년전쟁이 종료되었다. 이로써 중세가 끝났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은 동지중해를 장악하였다. 그러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통되는 물자들은 그 값이 폭등하였다. 따라서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지중해 항로 대신, 신항로 개척을 모색하였다. 이것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졌다. 한편 지중해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쇠락하였다. 대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이 주도하는 대서양 무역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밖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 그리고 기술자들이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유럽의 르네상스 발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World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하 전투 (0) | 2023.04.29 |
---|---|
애산 전투 (0) | 2023.04.29 |
제2차 비엔나 전투 (0) | 2023.04.29 |
하틴 전투 (0) | 2023.04.29 |
레욱트라 전투 (0) | 2023.04.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