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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오장원 전투

by 황금나무(Golden Tree)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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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소신에게 역적 토벌과 한 황실의 부흥을 맡겨주시고, 그를 완수하지 못할 시엔 그 죄를 묻고, 선황의 영령 앞에 고해주십시오. 폐하, 스스로 잘 살피셔서 옳은 방책을 취하시고, 바른 말을 가려들으시며, 선황의 유조를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폐하의 큰 은혜에 소신은 망극할 따름입니다. 멀리 떠나면서 글을 올리려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 융중대

제갈량은 융중에서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형주와 익주, 그리고 한중을 석권하고, 오나라와 연합하며, 때를 기다린 채, 위나라에 변란에 일어나면, 군대를 일으켜 관중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절대적 열세에 놓여있는 유비의 세력은 조조의 세력과 대등해지고, 그리하면 유비의 천하통일은 분명 큰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 한중과 익주에서 관중으로 진격하였고, 관중을 기반으로 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 이후 융중대는 착실하게 진행되었고, 이후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자, 비로소 유비는 한중왕을 칭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한나라의 고조 유방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400년간 지속된 한나라가 비록 망하긴 하였어도, 위나라 내부에서는 여전히 한나라에 충성하는 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몰아내고 한중왕을 칭하자, 위나라 내부는 적잖이 동요하였다. 그것은 위나라 내부의 한나라 충성파들에게 한나라 부흥의 신호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유비의 촉나라는 형주를 상실하였고, 이어서 이릉에서 오나라군에게 대패하였다. 형주 상실과 이릉전투 패배로 제갈량의 융중대는 어그러졌다. 유비마저 세상을 떠나니, 촉나라의 운명은 제갈량의 두 어깨에 달려있었다.

 

2. 계속되는 북벌의 실패

기원후 227년, 제갈량은 출사표를 촉나라 황제 유선에게 올렸다. 유비 사후, 5년 만이었다. 이릉대전의 패배로 촉나라는 국력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5년 동안 촉나라의 국력회복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즈음 위나라에서는 조비가 죽고, 그의 아들 조예가 황제로 즉위했다. 왕조국가가 으레 그렇듯, 전 황제가 죽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그 나라는 정세가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제갈량은 이를 기회로 보고 마침내 북벌군을 일으켰다. 이후 촉나라는 4차례의 걸쳐 북벌을 감행하였으나, 위나라의 사마의에게 막혀 번번이 철수하였다. 야전에서는 제갈량이 대부분 승리하였지만, 사마의는 그런 제갈량을 상대로 수비전만을 고집하였다. 공세의 주도권은 분명 제갈량이 쥐고 있었지만, 고질적인 군량부족 문제와 정세악화로 제갈량의 북벌군은 매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북벌을 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유비와의 약속을 지키고,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위나라와 비교한다면 촉나라의 국력은 압도적인 열세에 있었다. 따라서 촉나라가 그냥 가만히 있는다면, 언젠가는 위나라가 촉나라를 잡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촉나라는 반드시 관중을 손에 넣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4차 북벌 후 제갈량은 3년 동안 준비했다. 기원후 234년, 마침내 촉나라의 생존을 위해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군을 일으켰다.

 

3. 마지막 북벌

제갈량이 일으킨 북벌군의 병력은 10만여 명이었고, 이는 이릉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이었다. 위나라군은 제갈량이 위수 이남 미현 쪽에서, 무공까지 진격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산악지대로서 험준한 지형인 무공을 촉나라군이 차지한다면, 촉나라군이 매우 유리했다. 무공이 촉나라군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촉나라군은 그곳에서 곧장 위수를 통해 장안을 공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수비로 일관하던 위나라군은 공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때 당시 위나라에서는 제갈량을 야전에서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따라서 사마의는 제갈량이 오기 전에 무공을 막았다. 그러자 제갈량은 오장원으로 진군하였고, 거기에 주둔지를 세웠다. 그리고 그곳에 둔전을 설치하고, 민심을 다독이며, 아예 오장원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4. 오장원 주둔

촉나라군이 오장원에 자리를 잡자, 위수 이남이 촉나라의 영향력하에 들어왔다. 이것은 위나라에 있어 매우 거슬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나라군은 쉽사리 오장원을 공격할 수 없었다. 만약 위나라군이 오장원을 공격한다면, 촉나라군은 위수를 건너는 위나라군을 공격하거나, 설령 위나라군이 위수를 건넜다 할지라도 평지에서 150미터 솟은 구릉지대인 오장원을 공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서 공격을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당시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은 위나라의 영토가 된 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한나라의 발상지로서 제갈량의 슬로건인 ‘한나라 부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사마의가 위나라 군부의 수장이 되었을 때, 그는 관중일대에 대한 농업진흥을 장려하였었다. 그런데 그런 관중에 제갈량이 떡하니 자리 잡고, 주변 백성들과 농사를 지으니, 사마의 입장에서는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동시에 제갈량이 오장원에 주둔한 채, 계속 위나라의 여러 곳을 공격하자, 위나라 내부에서는 수비전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당시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군은 20만 명으로, 이런 대규모 군대에 대한 막대한 보급은 위나라의 국고에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의는 계속해서 수비로만 일관했다. 그렇게 양군 사이에서는 간간히 소규모 교전만이 벌어진 채, 약 백일의 시간이 흘러갔다.

 

5. 만약에

촉나라에서 제갈량은 황제를 제외한 최고권력자였다. 촉나라의 황제 또한 그에게 국정을 일임하고 있었기에, 촉나라 내부에서 제갈량의 입지는 그 누구보다도 탄탄했다. 반면 사마의의 입지는 제갈량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따라서 제갈량은 자신의 소신대로 군을 이끌 수 있었지만 사마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제갈량의 오장원 주둔과 지속적인 공세는 사마의의 수비전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위나라 내부에서는 사마의에게 공격을 종용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만약 사마의가 이런 내부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제갈량과 전면전에 나서게 된다면, 사마의는 패배할 것이 분명했다. 사마의가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까지의 전적만 살펴본다면, 제갈량을 야전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위나라에는 없었다. 만약 사마의가 무너진다면 제갈량을 그 기세를 몰아 장안으로 진격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관중 일대가 촉나라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그 옛날 한나라의 고조 유방의 재래로서, 위나라의 민심이 급속도로 촉나라에 기울게 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따라서 제갈량이 그대로 버티고만 있으면서, 위나라를 흔든다면, 제갈량의 대업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수명이란 변수였다.

 

 

6. 지고의 충신

기원후 234년 10월 8일, 제갈량이 사망했다. 향년 53세였다. 5차 북벌시 제갈량도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명은 제갈량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유비 사후 촉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릉대전의 결과로 촉나라는 거의 망할 뻔하였지만 제갈량은 단 5년 만에 촉나라를 재건하였다. 이어서 그는 촉나라군을 이끌고 무려 다섯 번이나 북벌을 감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갈량은 거의 매일 과로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멈추지 않았다.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며,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라는 말처럼 그는 죽은 후에야 비로소 멈쳤다. 그의 사후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했다. 사마의가 ‘망탁조의’ 4대 역적 중 한 명으로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때, 제갈량은 지고의 충신으로서 사람들의 흠모를 받았다.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유능한 충신들은 많았지만 유독 제갈량만이 사람들의 열렬한 흠모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만큼 온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사대부적 낭만성’을 구현한 인물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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