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 왕순은 개경에 접근한 거란족을 봤다. 지난번, 거란족이 침입했을 때, 왕은 수도 개경을 뒤로하고, 전라도로 피난을 갔었다. 그리고 그는 피난길에서 무수히 많은 치욕을 겪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고려의 왕은 이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두 번이나 도망칠 수는 없었다. 왕은 백성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결사항전을 다짐하였다.
1. 거란의 발흥
한국에서 후삼국시대가 전개되고 있을 때,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발흥하여 요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일대와 몽골초원을 지배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연운 16주마저 차지하였다. 한편, 그때 당시 중국은 5대 10국 시대로서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후주의 장군 조광윤이 후주의 어린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조광윤의 통치아래 송나라는 강성해졌고,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통일전쟁을 추진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후 북방의 요나라와 중국의 송나라 사이에서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양측 사이에서는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송나라는 경제력은 강하였지만 군사력이 약했다. 반면, 요나라는 그 당시 동북아 최강의 군사강국이었다. 따라서 둘 사이의 전쟁은 요나라의 승리로 돌아갔고, 기원후 1004년 양측은 전연의 맹을 맺었다. 그것은 송나라가 요나라에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세폐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송나라마저 물리친 요나라는 이어서 고려까지 위협하였다.
2. 사생아 왕
기원후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현왕이 폐위되고, 새로운 왕이 옹립되었다. 새로운 왕은 고려 현종이었는데, 그는 강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왕에게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사생아였다는 점이다. 그는 삼촌과 조카의 사통으로 태어났기에 왕족이었지만 그 입지가 매우 불안정했었다. 따라서 현종의 인생은 태어났을 때부터 무척이나 파란만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버드나무 아래에서 낳은 이후, 산욕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마저 그의 나이 5살 만에 죽으니, 졸지에 고아가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종 사후, 고려의 최고권력자가 된 천추태후가 그를 끊임없이 견제하였다. 천추태후는 그를 신혈사로 보내 스님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획책하였다. 몇 번이나 자객을 보낸 것은 물론, 독이 든 음식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혈사의 주지스님인 진관스님이 현종을 필사적으로 지켜냈으며,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도 현종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러던 때에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현종을 고려의 왕으로 옹립하니, 그의 나이 17세 되던 때였다.
3. 고려의 참패
그 이전에도 고려를 침입한 적이 있던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2차 침공을 감행했다. 요나라 황제 성종이 직접을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였는데, 그 병력의 규모는 무려 40만 명이었다. 이에 고려는 강조의 주도하에 30만 대군을 소집하여 맞섰다. 그러나 강조의 방심으로 고려군은 요나라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과정에서 강조는 사로잡혔으나, 요나라 황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였고, 결국 처형되었다. 이 전투로 고려군은 궤멸하였으며, 그 전사자는 3만여 명에 달했다. 이에 현종은 급히 피난길에 올랐고,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다. 현종의 피난길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현종을 곁을 지키지 않고 도주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 호족들마저 피난하는 현종을 위협하였다. 한편,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요나라군은 후방보급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고려 측에서 고려왕이 요나라 조정에 입조하겠다는 약속을 하자, 곧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로서는 구사일생으로 나라를 보존한 것이었다.
4. 요나라의 3차 침공
요나라의 2차 침입 이후 약 8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요나라는 계속해서 고려왕의 입조를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하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요나라의 성종은 소배압으로 하여금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고려는 강감찬을 최고사령관으로 하여 약 20만 명의 군사로 요나라군에 대응하였다. 전쟁초반 고려군은 흥화진에서 요나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요나라군은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곧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진격하였다. 또다시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종은 물러서지 않았으며, 청야전술을 실행하여 맞섰다. 이미 요나라군은 무리해서 남진하였기 때문에 곳곳에서 고려군에게 피해를 입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개경에 도착한 소배압은 기병 300기로 하여금 개경 주변을 탐색하게 하였다. 이에 현종은 기병 100기로 하여금 야간에 기습하여 이들을 전멸시켰다.
5. 귀주 대첩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소배압은 후퇴하였다. 그리고 후퇴하는 요나라군을 고려군이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군은 귀주에서 요나라군을 반드시 무찔러야만 했다. 그래야만 다시는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하지 않을 것이었다. 반면, 요나라군이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귀주를 통과해야만 했다. 요나라군은 북쪽에 위치하였고, 고려군은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양군 모두 배수진을 쳤다. 드디어 양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초반은 요나라군에게 유리했는데, 북풍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요나라군의 화살공격은 북풍으로 인해 매우 위력적이었다. 수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은 막상막하였다. 그러던 중 개경에서 출발한 고려군 기병 1만 명이 요나라군의 배후에 들이닥쳤다. 그러면서 동시에 풍향이 남풍으로 바뀌었다. 이제 고려군이 매서운 화살공격을 할 차례였다. 요나라군은 붕괴되었고, 이내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요나라 본국에 귀환할 수 있었던 요나라군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고려의 대승이었다. 이로써 26년간 벌어진 고려와 요나라간의 전쟁이 고려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6. 전투 결과
고대로부터 한반도의 나라들은 수성전에 강하고, 평야전에서는 약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귀주에서 평야전에 강하기로 유명한 그 요나라군을 대패시켰다. 이후, 요나라는 고려정복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주변 세력들도 고려를 강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동북아에서는 고려, 요나라, 송나라의 삼강구도가 정립되어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고려는 이 전투의 승리로 무려 백 년간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야말로 현종의 굳건한 의지와 강감찬의 탁월한 지휘, 그리고 고려 백성들의 단결이 만들어낸 빛나는 승리였다.
7. 위대한 군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 현종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하였다. 그는 출생 후 20대 후반까지 참으로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사생아, 조실부모, 잦은 암살 음모, 전쟁과 반란 등의 온갖 시련을 겪었다. ‘시련은 사람을 녹슬게 만든다.’라는 말처럼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법도 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남에게는 관대했다. 그는 백성들과 함께 고생하였으며,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신경 썼다. 국난 중에도 고려의 행정제도를 정비하였고, 지방호족들을 자신을 중심으로 단결시켰다. 다른 유능한 군주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들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성장했던 반면, 고려 현종은 어려서부터 온갖 시련을 겪었다. 그렇게 고생 끝에 왕이 되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쟁과 반란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성군이 되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고려의 백년 전성기도 없었을 것이다. 과연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고려 말의 유학자 이제현은 고려 현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현종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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