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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History

세키가하라 전투

by 황금나무(Golden Tree)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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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음으로서 임진왜란이 끝났다.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곧 일본 내부는 갈등과 대립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장파와 문치파가 대립하였고,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이 대립하였다. 끝내 일본 전역은 서군과 동군으로 갈리었고,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일본의 지배자가 될 터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년 10개월 만이었다.

 

1. 도요토미 가문의 비극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53세에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츠루마츠였다. 그러나 츠루마츠는 선천적으로 병약하여 생후 2년 만에 사망하고 만다. 히데요시는 매우 슬퍼하였으나, 그로서는 더 이상 후계자 선정을 미룰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여동생의 아들 히데츠구를 양자로 들이고,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 일환으로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관백직을 잇게 하고, 그 자신은 관백 위의 태합이 되어 군림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새로운 아들을 얻게 되니, 아들의 이름은 히데요리였다.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태어나자, 기존의 있던 히데츠구의 입지는 몹시 위태로워졌다. 히데요시에게 있어 양아들이자 조카인 히데츠구는 이제 친아들 히데요리의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히데츠구가 유력 영주들에게 돈을 빌려주자, 히데요시는 그것을 빌미 삼아 모반혐의를 덮어 씌었다. 숙청이었다. 숙청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히데츠구 일가는 문자 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또한 연루된 유력 영주들마저 히데요시가 숙청하려 들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나서서 이들을 구명하였다. 후에 이 유력 영주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그러던 중 기원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이로써 임진왜란이 끝났다. 그의 아들 히데요리가 5살 되는 해였다.

 

2. 무장파와 문치파의 대립

한편,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서는 무장파와 문치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무장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군사적으로 도우며, 임진왜란에도 참여한 세력이었다. 반면, 문치파는 전투 이외의 행정, 경제, 병참, 종교 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좌하였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문치파의 필두로서 융통성이 없고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이었는데, 다수의 무장파 영주들이 그를 싫어하였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그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 제일의 실력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대로 일본을 주무르지는 못했다. 히데요시는 생전에 5명의 유력한 영주들을 오대로로 선정하여 자신의 사후에 자신의 아들 히데요리를 보좌케 하였다. 동시에 오대로는 이에야스에 대한 견제장치이기도 했다. 특히 오대로 중 한 명인 마에다 토시이에는 도요토미 정권의 2인자이자, 히데요시의 맹우였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도요토미 정권의 수호자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였고, 무장파와 문치파의 사이를 중재하였다. 그러던 중 기원후 1599년 마에다 토시이에가 사망하였다. 이후 무장파와 문치파의 대립은 격화하여 급기야 가토 기요마사 등의 무장파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평소 자신이 증오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야스가 양자를 중재하였다. 이후 이에야스는 그를 사와야마 성까지 경호해 주었으나, 동시에 그를 오봉행직에서 일방적으로 파직하였다.

 

3. 인내의 달인

기원후 1586년경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였으나, 그의 세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시 벽지였던 간토지방으로 그의 영지를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간토지방을 훌륭하게 발전시켜 금싸라기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예전 영지에 대한 영향력도 잃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가 되었다. 한편으로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동안에 수시로 조선으로 출병할 것은 종용받았으나, 간토지방의 경영과 반란진압을 명분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럼으로써 다른 영주들의 군사력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약화되고 있을 때, 그는 그동안 자신의 군사력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을 때에도 그는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도요토미 정권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던 마에다 토시이에마저 사망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4. 동서대전

한편, 이시다 미츠나리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반 도쿠가와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그러던 중,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야스는 이를 토벌하고자 아이즈로 출병하였다. 그러자 이것을 기회로 여긴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하였다. 아이즈로 향하던 이에야스는 그 소식을 듣자,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중간에 도요토미파 영주들이 그를 견제할 것으로 예측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그리하여 이시다 미츠나리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양군이 조우하였고, 양군은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하였다. 임진왜란인 끝난 지 1년 10개월 만이었다. 흔히 이시다 미츠나리의 군을 서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을 동군이라 부른다. 양군의 병력규모는 서군이 10만 4천 명이었으며, 동군이 8만 2천 명이었다. 포진을 살펴보면 서군은 사사오 산, 덴만 산, 마쓰오 산, 난구 산 등에 포진하여 학익진의 형세를 취했다. 반면, 동군의 형세는 그 학익진으로 들어가는 듯한 포진이었다. 따라서 병력규모와 포진만 본다면 서군이 유리하였다. 기원후 1600년 10월 21일 양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초반에는 양군이 엎치락뒤치락하였다. 그러다 정오 무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군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진영에 사격을 가하자, 깜짝 놀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신하였다. 사실 이에야스는 전투 전부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회유하고 있었다. 전투 중반까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서군과 동군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위협사격을 받자, 그는 동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신하자, 다른 영주들도 줄줄이 배신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른 영주들도 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전황은 급격하게 동군에게 유리해졌고, 결국 서군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전투 이후, 이시다 미츠나리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5. 승리하는 군대는 이겨놓고 싸운다

사실 이시다 미츠나리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군은 이미 전투 전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인망이 거의 바닥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모리 데루모토를 명목상의 총대장으로 내세워 군을 모을 수 있었다. 이미 지휘체계부터가 이원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명목상의 ‘총대장님’은 끝내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서군 영주들 중 억지로 참여한 이들도 많았거니와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들을 장악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서군의 영주들은 전투 중인 아군을 돕기는커녕 수수방관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끝내 연달아 배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하였는데, 서군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반면, 동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단결되어 있었다. 서군은 물론 동군 측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이 많았는데, 동군 측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은 이시다 미츠나리를 제거한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동군에 가담하였다. 아울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수시로 서군측의 영주들을 회유하였고, 적잖은 서군측 영주들이 여기에 흔들리고 있었다. 손자병법에도 이르기를 ‘승리하는 군대는 이겨놓고 싸우고, 패배하는 군대는 싸운 다음에 승리를 구한다.’하였다.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싸우기도 전에 이긴 상태였다.

 

 

 

6. 최후의 승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일컬어 일본 사람들은 전국 3영걸이라 부른다. 일본 전국시대에는 이들 셋을 비롯하여 수많은 군웅들이 각축을 벌였고, 결국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그는 기회가 올 때까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실수도 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았고, 기회가 올 때까지 착실하게 자신의 힘을 길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도 그는 신중했다. 마에다 토시이에마저 사망하자, 그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고, 세키가하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승리하였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일본 안에는 없었다. 명실공히 일본 제일의 실력자가 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쇼군이 되었고, 자신의 근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265년 에도막부가 열렸다. 그야말로 인내의 승리였다. 이후 그는 호코지 종명사건을 빌미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 성마저 공격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켜 버렸다. 그런 말이 있다. ‘오다가 쌀을 찧어 하시바(도요토미)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 힘들이지 않고 먹은 것은 도쿠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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