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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이수스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2년 동안 그는 지중해 동부 해안 일대와 이집트를 누비며, 그곳들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어서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은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소집하였다. 결국 양국의 군대는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격돌하였다. 1. 양군의 규모 마케도니아군의 총병력은 47,000명이었는데, 구성은 중장보병이 31,000명으로 세부적으로는 장창병 12,000명, 방패병 3,000명이었고, 그밖에 그리스 동맹군이 7,000명, 그리스 용병이 9,000명이었다. 아울러 경보병은 9,000명, 중기병은 5,000명, 경기병은 2,000명이었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용병 .. 2023. 4. 29.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병사는 그날을 떠올렸다. 청동투구와 흉갑, 정강이받이로 온몸을 무장한 아테네의 중장보병들이 왼손에는 거대한 원형방패를 오른손에는 긴 창을 꼬나쥔채 자신들에게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페르시아 궁수들이 열심히 사격을 가했지만 그 무시무시한 청동괴물들은 아랑곳하지 하고 페르시아 병사들을 무참히 살육하였다. 페르시아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로 도망쳤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1. 폭풍, 흙, 물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그리스 원정을 명령하였다. 그것은 이오니아 반란에 개입했었던 괘씸한 아테네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492년에 그리스 원정군이 출발하였지만 아토스 곶에서 폭풍우를 만나 함대의 절반을 잃었고, 마르도니우스 장군도 트라키아에서 부상을 입게 되었다.. 2023. 4. 29.
배넉번 전투 한 잉글랜드의 기사가 군대를 사열 중이던 스코틀랜드 국왕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 공격을 피하고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리찍어버렸다. 이 모습을 본 스코틀랜드군의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고 사기는 드높아졌다. 왕은 도망자 생활을 할 때부터 몇 번이나 추격자와 배신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였다. 왕의 이름은 로버트 브루스,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한 구국의 영웅이다. 1. 로버트 브루스의 청야전술 폴커크 전투에서 패배한 스코틀랜드는 그 이후 잉글랜드와의 전면전을 회피했다. 새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2세가 2차례에 걸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청야전술에 당해내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잉글랜드는 우위에 있는 경제력 및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는 성과가 없었다. .. 2023. 4. 29.
파르살루스 전투 루비콘강, 그 강은 본국 로마와 속주의 경계였다. 그 어떤 군대도 이 강을 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반란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그 앞에 있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카이사르의 등 뒤로는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수많은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 하나, 카이사르의 도하명령이었다. 이윽고 카이사르가 말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내전의 시작이었다. 1. 배경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 일파는 크게 당황했다. 그렇게 빨리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폼페이우스 일파는 수도 로마를 버리고, 그리스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였다. 카이사르는 해군 전력이 열세였.. 2023. 4. 29.
알레시아 전투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에서 로마군을 내려다보았다. 로마군은 한창 진영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진영은 알레시아를 둘러싸고 있었고, 진영의 앞뒤로는 호와 해자, 방벽과 둔덕, 그리고 다양한 함정과 장애물들이 착실하게 설치되고 있었다. 마치 요새 같은 포위진이 차차 완성되어 갔다. 그 포위진의 목표는 한 명의 남자였다. 베르킨게토릭스, 최초로 카이사르에게 패배를 안긴 남자였다. 1. 배경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그 임기가 종료되자, 갈리아 남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게르마니아에 있던 헬베티족이 갈리아 중북부를 침입하자,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였다. 카이사르는 이 요청에 응하였고, 점점 갈리아의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카이사르는 입으로는 갈리아를.. 2023. 4. 29.
브라이텐펠트 전투 스웨덴군의 병사들은 교회 종을 힘껏 쳤다. 그 종은 신성 로마 제국군의 종군사제들로부터 스웨덴군의 병사들이 전리품으로 뺏은 것이었다. 그 종소리는 사방으로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스웨덴군의 병사들은 함성을 질러댔다. 그 종소리는 승리의 종소리였다. 신교군이 제국군으로부터 거둔 첫 승리였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하는가”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1. 배경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발발한 30년 전쟁은 어느덧 제3기에 접어들었다. 당시 30년 전쟁의 무대였던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리었는데, 이 신성 로마 제국은 하나의 단일한 국가가 아닌 여러 제후국들의 연합체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제후국들은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치열하게 투쟁하였으며, 주변국들도 이에 개.. 2023. 4. 29.
크레시 전투 프랑스 기사들은 영국군에게 돌격했다. 그 위용은 무시무시했다. 가히 당대 최강이라 불린 프랑스 기사다운 용맹스러운 모습이었다. 많은 이들이 곧 영국군이 박살이 날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영국군이 언덕 위에 있었고, 전날에 내린 비로 땅이 진흙탕이 되었지만 명예로운 프랑스 기사들에게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난관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화살비를 볼 때까지는 말이다. 1. 배경 서기 1328년 프랑스에서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카페왕조가 단절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카페 왕가의 모계혈통임을 들어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하였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라는 샤를 4세의 누이였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의 삼부회는 프랑크 왕국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살리카 법을 근거.. 2023. 4. 28.
만지케르트 전투 한 남자가 셀주크투르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 앞에 끌려 나왔다. 그 남자의 이름은 로마누스 4세,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술탄이 황제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당신의 포로가 된다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 것이오?” 황제가 대답했다. “아마도 당신을 죽이고 콘스탄티노플 거리에 그대의 시체를 전시했을 것이오.” 그러자 술탄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릴 벌은 그것보다 더 무섭다오. 나는 당신을 용서하고 당신을 풀어줄 것이오.” 1. 배경 로마 제국 멸망으로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세시대에,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동유럽에서는 비잔틴 제국이 오늘날의 중동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일어났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할 때 서로마 제국은 멸망한데 반해 동로마 제국은 중세까지 살아남았.. 2023. 4. 28.
아드리아노플 전투 로마 제국의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황제가 북방에 침입한 야만족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대 사건이었다. 제국은 그 이전에도 수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잘 극복해 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외국의 군대와 이민족들이 제국을 침범했지만 최종적인 승리는 언제나 로마 제국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이 패배는 가히 로마 제국 멸망의 전주곡이라 할만한 사건이었다. 1. 배경 서기 376년경 동방으로부터 침입해 온 훈족을 피해 서고트족이 동로마 황제 발렌스에게 로마 제국으로의 이주를 요청하였다. 발렌스 황제는 이를 수락하여 트라키아(오늘날의 불가리아)로 이주할 것을 허락하고 총독에게 원조를 명령하였다. 이때 당시 로마 제국은 군사력에 있어서 곤란한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발.. 2023. 4. 28.
칸나이 전투 그날 바알 신전 안에는 한 아버지와 한 아들이 있었다. 그 아홉 살짜리 소년은 아버지 앞에서 맹세했다. 반드시 로마를 멸망시키겠다고. 훗날 이 소년이 저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에 침입했을 때, 로마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로마의 그 어떤 장군도 그를 대적할 수 없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로마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공포로 각인되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한니발, 로마인들이 사상초유의 국난이라 부른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인공이었다. 1. 배경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 저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쳐들어 온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의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의 칸나이 평원에서 약 9만여 명의 로마군을 맞이한다. 이때 당시 한니발은 에스파냐에서부터 데려온 2만 6천 명의 정예병력과 갈리..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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